[문화 읽기] 히로시게의 고즈넉한 밤눈

입력 : 2020-12-28 00:00 수정 : 2021-01-2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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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히로시게, ‘간바라의 밤눈’. 1832, 우키요에 미술관, 오반, 일본.

마지막 잎새처럼, 2020년 달력이 달랑 한장 벽에 붙어 있다. 저 한잎 떨어지면, 올해도 끝난다. 주 요리는 끝나고 이제 디저트를 먹을 차례라고나 할까. 디저트 같은 그림을 소개하며 위로하듯 올해를 마무리하려 했는데, 의도와는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의 겨울 그림을 고르게 됐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8년)의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년)가 그린 ‘간바라의 밤눈’이다. 눈을 배경으로 하는, 아니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 그림이다.

히로시게는 1832년에 공적 업무를 하는 관리 수행원들을 따라 에도에서 교토 사이의 도카이도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도중에 역참에 묵을 때마다 그는 눈으로 봤던 경관을 스케치해뒀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도카이도 53역참>이라는 판화집을 제작했다. 이 연작은 53개 역참의 풍경과 더불어 출발지와 도착지 장면까지 합해 총 55점으로 이뤄져 있다. ‘간바라의 밤눈’도 그중 하나다. 히로시게 그림만의 시적인 분위기와 대담한 구도, 그리고 색과 선의 독특한 기법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서양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빈센트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판화 몇점을 그대로 유화로 모작하기도 했다.

1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길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히로시게는 말년에는 종교적인 명상에 심취했다. 그는 선불교 승려로 귀의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접었다. “나는 동쪽에 붓을 남겨두고, 이제 여행을 시작한다. 곧 서쪽의 명승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히로시게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글인데, 여기서 서쪽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그가 화가로서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구경했던 서쪽 도카이도에 대한 그리움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나중에 택한 불교적인 목적지인 서방극락 정토(淨土)를 암시한다.

‘간바라의 밤눈’은 까만 밤을 그린 것인데, 눈으로 하얗게 밝혀져 있다. 고요하던 마을은 한결 더 고요해졌다. 쌓이는 눈 입자들은 점점 옛 시간의 흔적을 지워가고, 그 위로 사람들은 다시 새 흔적을 남기며 종종걸음을 친다. 눈 오는 날엔 좀 더디고 늦어져도 스스로 괜찮다고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하늘과 땅이 하얘져서 앞이 통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혹시 여기도 눈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글을 쓰면서 줄곧 창밖을 흘깃거렸다. 한해의 소란을 묻어줄 새하얀 기적이 내려주면 좋겠다. 올 연말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긴 책을 힘겹게 읽고 난 느낌이다. “독자들은 대개 긴 책에 찬사를 보낸다. (책이 대단하다기보다) 자신이 그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 장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가 한 말이다. 내용은 몰라도 이제 책을 덮으려 한다. 이렇게 2020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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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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