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신록과 부활

입력 : 2022-05-20 00:00

북풍 견딘 앙상한 플라타너스 5월 들어서자 푸른잎들 ‘풍성’

무성한 여름 거치면 가을 닿고 그다음은 다시 겨울인 것을…

시간 흐르며 반복되는 새로움 ‘불멸’ 대신 ‘부활’이라 부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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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보다 신록에 끌린다. 5월이 신록의 달이란 이야긴 어려서부터 들었지만 신록의 참된 의미를 따져본 적은 없었다. 작업실을 섬진강으로 옮긴 뒤, 창문으로 플라타너스들의 앙상함을 하루에도 몇번씩 살피며 겨울을 보냈다. 지금 이 계절을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과 연결해 상찬하는 이유가 새삼 궁금했다.

한겨울 어둑새벽 출근길엔 작업실로 들어가지 않고 앞마당 플라타너스들을 차례차례 지나며 까치 둥지 네개를 올려다봤다. 높은 가지에 덩그러니 놓인 둥지로 까치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왜 저렇게 들녘 사방에서 훤히 보이는 자리에 삶터를 마련했을까.

그 물음은 4월을 지나 5월로 들어서며 저절로 답을 얻었다. 봄이 되고 새로 잎이 나기 시작하자 플라타너스는 하루가 다르게 풍성해졌다. 푸른 잎들이 검은 불발탄처럼 박힌 둥지를 겹겹이 감쌌다. 오목눈이나 동박새는 물론이고 제법 덩치가 있는 까마귀가 가지에 앉아도 찾기 어려웠다.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잎들을 집중해서 노려야 둥지 위치를 겨우 가늠할 정도였다.

겨울 내내 북풍을 견디는 앙상한 나무들을 지켜보았기에 지금의 신록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폭설에 영하 10℃를 오르내렸던 날에는 나무들이 저대로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볏단을 안고 나가 밑동을 둥글게 감아줬지만, 까치발로도 손이 닿지 않는 줄기와 가지가 너무 많았다. 꽁꽁 언 잿빛 나무들이 네댓달 뒤 신록을 자랑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5월엔 봄이 한창이니 신록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참혹한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겐, 겨울이 끝났으므로 신록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서 겨울로 이어진 어두운 시절이 또한 적지 않았다. 지난 2월엔 겨울을 무사히 넘기나 했던 플라타너스 한그루가 갑자기 밑동이 부러지며 쓰러졌다. 사람 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는 다시 잎을 틔우기 위해 매일 분투했던 것이다. 나이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지며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이 나무의 의지를 떠올렸다.

나무는 안다. 앙상한 겨울에서 신록의 봄을 지나고 무성한 여름을 거치면 단풍 드는 가을에 닿고, 그다음은 다시 겨울인 것을. 이 흐름을 아는 사람 역시 신록 앞에서 봄의 싱그러움과 함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각기 다른 삶을 함께 떠올릴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지 않고, 사람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모순까지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서도 신록을 다시 생각했다. 주인공 라짜로가 안팎으로 행복한 까닭은 바삐 변하는 세상 속에서 신록과도 같은 성정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라짜로는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일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다. 신분 높고 돈이 넉넉한 자들은 물론이고 가난한 농부들 사이에서도 라짜로는 바보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나무가 바보가 아니듯 라짜로도 바보가 아니다. 신록에 이르는 과정과 짧다면 짧은 푸른빛을 즐기는 방법과 신록이 지나간 뒤 다시 올 때까지 참고 그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번창하는 여름을 자랑할 때 라짜로는 봄을 지키며 머물고, 누군가 가을의 결실을 내보일 때 라짜로는 파종을 걱정하고, 누군가 고통스러운 겨울에 힘겨워할 때 라짜로는 산뜻한 봄바람을 닮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라짜로는 네배 더 즐겁게 새로운 푸른빛에 물든다.

반복되는 새로움을 우리는 ‘불멸’이라고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불멸 대신 ‘부활’을 넣어도 마찬가지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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