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거리 두기 없는 겨울의 맛난 모임

입력 : 2020-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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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의 ‘야연(19세기, 비단에 채색, 76×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침이 도는 그림으로 눈요기해보자. 성벽 아래 눈 내린 자취가 남아도 잔설을 털어낸 솔잎은 나우 파랗다. 무늬진 돗자리에 남녀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 거리 두기는 아랑곳없이 흥청거린다. 가운데 놓인 화로를 보니 눈치채겠다. 색이 고운 고기 토막이 불판에서 익어간다. 경단과 나물이 담긴 접시, 술잔과 종지가 놓인 개다리소반, 국물이 있는 탕기와 국자 등이 곁에 나란하다. 19세기 한양 풍속 중에 가장 맛있는 풍경이다.

<동국세시기>에 기록이 있다. ‘근래 생긴 풍속 하나.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불판을 올린다. 쇠고기를 기름·간장·달걀·파·마늘·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 이것을 난로회(煖爐會)라 부른다. 음력 10월에 추위를 막는 시식(時食)이다.’

때에 맞춘 음식이 곧 ‘시식’이다. 저무는 한해의 회식 자리인 난로회에선 벗들을 불러 덥힌 술을 주고받으며 불고기를 안주 삼아 회포를 풀었단다. 난롯가 흥취야 그림 안 봐도 눈에 선하다.

풍속화인 ‘야연(野宴)’은 남부러운 들놀이를 묘사한다. 그때가 언제이던가. 도살 금지령에다 금주령이 엄연하던 시절이다. 화로에 쇠고기 구우며 입맛 다실 정도라면 한 벼슬하는 이들이 아니고선 어림없다.

노는 가락을 살펴보자. 왼편에 두건을 쓰고 남바위 차림이 버젓한 두 사내는 털방석까지 갖췄다. 탕건 바람에 쾌자를 걸친 사내는 연둣빛 저고리에 쪽빛 치마를 입은 여인이 건네는 고기 한점을 입 딱 벌리고 받아먹는다. 맞은편 붉은 저고리에 무명 수건을 두른 여인은 침을 꿀떡 삼키며 먹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린다.

이날 고기 뒤집는 수고는 젊은 축인 갓쟁이가 맡았다. 가랑이가 드러나게 쪼그려 앉아 젓가락을 들고 육즙을 살핀다. 웃기는 건 신발을 신은 채 자리에 뛰어든 오른쪽 사내의 거동이다. 허리에 붉은 띠를 두른 것으로 봐 제법 품계가 높을 성싶은데, 뒤늦게 와서 고개를 빼들고 남은 고깃점부터 헤아린다. 맛있는 자리에 너볏한 양반 없다더니, 채신머리 구기는 짓이다.

마침 ‘설리적(雪裏炙)’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의 조리도 전해진다. 쇠고기를 납작하게 썰고 칼등으로 두드린다. 꼬챙이를 꿰고 기름과 소금으로 양념해서 꼭꼭 누른다. 그 고기를 은근한 불에 굽는 중간에 물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어 굽는다. 이렇게 세번 하고 다시 참기름을 발라 구우면 맛이 더 좋다. 이름에 눈 ‘설’ 자가 들어간 것은 왜일까. 고기를 물에 넣지 않고 눈에 적시기도 해서란다.

8폭 병풍에 실린 이 그림은 작자 미상이다. 비슷한 풍속화도 몇점 있다. 같은 소재가 자주 그려졌다는 것은 연말의 익숙한 풍속, 즉 조선시대의 ‘먹부림’ 현상을 대놓고 알려준다.

요즘도 한해의 석양이 기우는 세밑에 벗끼리 맛난 자리를 만든다. 고기 굽고 술잔 나누는 난로회의 식미가 살아남은 셈이다. 누구 말마따나 한잔에 주름진 얼굴 펴지고, 두잔에 추운 날씨가 풀리고, 석잔에 마음 든든해지면 좀 좋으랴. 가는 해는 이마저 대략 난감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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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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