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대기업 회장이 경운기를 사려던 이유는

입력 : 2021-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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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던 이모씨는 2005년부터 강원도의 한 농촌마을 농지를 집중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2007년까지 그가 매입한 농지는 113필지로 면적은 27만1571㎡(8만2150평)에 달했다. 농지는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농민이나 농업법인만 소유할 수 있고 도시민이 주말농장을 위해 취득할 수 있는 농지는 1000㎡(303평)까지다. 농민이 아닌 이씨가 농지를 대규모로 사들일 수 있었던 건 농지취득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관할 면사무소에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짓겠다는 농업경영계획서를 제출하고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받았다. 이씨가 제출한 농업경영계획서에는 직업이 회사원으로 적혀 있었고, 경운기와 관리기를 구입하겠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이씨가 땅을 사들이는 사이 그가 운영하던 업체는 골프장을 짓는 절차에 들어갔고, 2008년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골프장 조성 허가를 내줬다. 나중에 이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으로 확인됐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지만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사안을 파헤쳤던 국회 관계자는 “농지취득자격증명은 농지 취득 후 사후에, 그것도 ‘임의 선정’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사실상 형식적인 요건에 불과하다”며 “법 위반 시 처벌할 수 있는 공소시효도 5년에 불과해 책임을 묻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경기 광명·시흥 신도시 투기 의혹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정부의 신도시 개발 발표 전에 LH 직원들이 해당 토지를 매입했다는 의혹은 정부 차원의 신도시 전체에 대한 조사로 확대됐다. LH 직원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개발 발표 며칠 전에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희귀수종까지 심었다는 것은 농지취득자격증명서나 현장을 살펴보면 금세 드러날 수 있는 대담한 방식이다. LH 직원들이 사들인 토지의 98.6%는 농지다. 드러난 의혹은 ‘빙산의 일각’일 뿐 이런 일이 관행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진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들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다. 경자유전 원칙을 지키고자 1994년 농지법을 만들었지만, 이 법은 수많은 예외 규정을 통해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경자유전 원칙이 급격히 무너졌고, 사회지도층 인사를 비롯한 상당수의 비농업인이 농지를 소유하는 결과를 낳았다. 농지법 제정 당시 경자유전의 예외는 ‘상속으로 농지를 취득하는 경우’ 정도였다. 이후 농지 소재지 거주 요건이 폐지되면서 비농업인도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발급받아 농지를 구입·소유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소유자와 경작자가 다른 농지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농업법인의 농지 소유 요건을 느슨하게 규정한 것도 현행 농지제도의 취약점이다. 1990년 영농조합을 시작으로 농업법인의 농지 소유가 허용됐다. 이후 비농업인이 법인에 출자할 수 있는 한도는 33.3%에서 90%로 확대됐고, 농민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요건도 사라졌다. 투기꾼들은 물론 대기업까지 농업법인을 설립해 농지 투기를 도모할 수 있게 됐다. 전국의 골프장 상당수가 농업법인의 이름을 빌려 농지를 사들인 뒤 농지 전용 절차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농지는 농민의 핵심 생산수단이자 주요 자산이다. 이런 농지가 도시민과 거대 자본의 투기수단으로 변질되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 임차농지를 구하려는 무한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LH 사태를 단순히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 정도로 마무리한다면 농지 투기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농지 소유·이용 제도를 전면적으로 손봐야 한다.

김상영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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