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

입력 : 2019-09-23 00:00 수정 : 2019-11-07 13:55


이성계가 사저에서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어떤 이가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다며 이상한 글을 바쳤다. ‘목자(木子)가 돼지(猪)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목자(木子)는 오얏 리(李)를 의미하니 곧 이씨가 왕이 된다는 비결이었다. 그를 옥좌에 올려준 돼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1호 돼지가 됐고, 이후 돼지는 무려 730여차례나 등장한다.

태조 이성계를 업어준 저(猪)는 원래 ‘돝’이다. 돝이란 표기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남 마산 앞바다의 돝섬이다. 바로 옆 거제에는 대통령 휴양지였다가 최근 일반에 공개된 저도(猪島)가 자리해 유명세를 더한다. 돼지는 돝의 새끼라는 ‘돝아지’의 변형으로 상형문자로는 시(豕)다. 이 돼지(豕)에 고기를 의미하는 육달월(月)을 붙여 만든 한자가 돈(豚)이다. 그래서 돼지 돈(豚)은 저(猪)보다 ‘가축’과 ‘고기’의 의미를 내포, 양돈(養豚)이라는 낱말이 탄생했다.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한자의 어원을 담은 <설문해자>에서 돼지 돈(豚)자를 찾으면 우(又)자가 붙어 있는 금문(文)이 보이는데, 이는 돼지고기가 먹어도 또 먹고 싶을 만큼 맛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 만큼 돼지의 한자표기도 많다. <설문해자>에는 돼지 시(豕)를 필두로 돼지띠를 말하는 돼지 해(亥) 등 30여자가 수록돼 있다.

이같은 돼지 위상은 조선시대 농서(農書)에 그대로 드러난다. 17세기 박세당의 <색경>을 시작으로 실학자들이 쓴 농서는 돼지 기르는 법을 담고 있다. 실학자 최한기는 <농정회요>에서 어미돼지는 주둥이가 짧고 털이 억세야 좋고, 새끼는 낳은 지 3일째에 꼬리를 잘라주고 60일째에 거세를 해야 한다고 적었다. 또 돼지 살을 찌우려면 빻은 깨 두되를 소금 한되와 볶아 쌀겨 석되에 섞어 먹이면 된다고 했다. 특히 무나 가래나무 꽃을 먹이는 돼지 전염병(瘟疫) 치료법도 실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돼지는 연간 생산액 기준 2016년과 2017년 연속으로 쌀을 제치고 농업생산액 1위에 오르는 등 우리 농업의 대표주자로 부상했다. 우리나라는 연간 1100만마리의 돼지를 사육해 중국과 미국 등에 이은 세계 7위의 양돈국가다. 이런 우리 돼지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다. 경기 파주에서 시작된 돼지열병은 연천까지 번졌다. 치사율이 100%로 ‘돼지흑사병’으로 불리지만 예방백신은 물론 치료제도 전무해 발생하면 살처분 외에 대응책이 없다. 돼지는 올해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의 힘찬 기운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무허가축사(미허가축사) 적법화, 양돈장 악취와 분뇨처리, 퇴비부숙도 규제 강화에다 돼지값 불안 등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2지지(地支) 막내인 돼지(亥)는 음양오행상 물(水)의 기운을 타고나 방위는 북(北), 천시(天時)는 비(雨), 숫자는 1과 6에 해당된다. <주역>에서도 감(坎)괘 동물로 역시 물이다. 이번 ASF가 발생한 파주와 연천은 북쪽에서 흘러드는 물인 임진강 유역이다. 양력은 16일, 음력으론 18일에 처음 발병했고 태풍 ‘링링’에 따른 많은 비바람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루트라는 점 등 신기할 정도로 물과의 연관성이 짙다.

우리는 2010년말부터 2011년 봄까지 구제역으로 350여만마리의 돼지와 소를 땅에 묻은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잘못하면 한 세대(世代)가 국산 삼겹살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잖아도 유럽과 남미산 삼겹살이 국산 삼겹살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삼겹살구이는 1970년대 중후반 서울 종로와 구로공단 등지에서 시작돼 1994년 국어사전 표제어에 오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음식이다. 이런 우리 삼겹살의 맥을 잇고 구겨진 기해년 황금돼지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ASF 조기퇴치에 총력을 다하자.

한형수 (취재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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