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멧돼지를 위한 변명

입력 : 2019-11-08 00:00


올해 가장 ‘핫’한 동물로 멧돼지를 꼽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이 있을까. 9월 이후 멧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을 전파하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연초 상서롭게 시작한 황금돼지의 해를 멧돼지의 해로 만들어버렸다.

돼지는 행운을 상징하지만, 사실 멧돼지는 동서고금을 둘러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는 동물이 아니다. 중국 고대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는 봉희(封 )라는 멧돼지가 초나라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민폐를 끼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는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가 사방으로 날뛰면서 논밭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말의 저돌적(猪突的, 흔히 저(猪)는 멧돼지, 돈(豚)은 집돼지를 일컬음)이라는 단어도 앞뒤 재지 않는 멧돼지의 사나움에서 파생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멧돼지를 유해동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멧돼지가 과연 ASF의 주범일까. 지금 방역당국과 축산업계가 접경지의 멧돼지를 유력 용의선상에 올린 데에는 북한에 ASF가 만연한 것으로 추정되고, 현재 ASF가 휴전선 인근지역에서만 발생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멧돼지가 ASF를 옮긴 사례가 많아서다. 게다가 최근엔 집돼지가 아닌 야생멧돼지에서 ASF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며 혐의가 더 짙어졌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 모든 것에 다만 심증만 갈 뿐 멧돼지가 ASF를 옮기고 널리 퍼뜨렸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방역당국이 진행 중인 역학조사도 가장 개연성 높은 원인을 추정할 뿐 물증은 찾지 못할 확률이 높다. 한마디로 멧돼지는 증거불충분인 것이다.

도리어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멧돼지의 변명을 좀 들어볼작시면 이렇다. 5월말 중국과 접경인 자강도에서 발생한 것만 확인된 북한 ASF가 남쪽 휴전선 부근까지 퍼졌다는 걸 100% 장담할 수 있나, 퍼졌다고 하더라도 (국방부 장관 얘기처럼) 휴전선에 이중삼중으로 완벽하게 철조망이 쳐져 있고 임진강에도 열상감시경계시스템을 가동 중인데 어떻게 북한 멧돼지가 내려올 수 있나, 만에 하나 북에서 넘어온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러붙었다고 하더라도 축사마다 울타리가 쳐졌는데 무슨 수로 집돼지에 접근하나….

멧돼지를 통한 유입설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만약 먼 훗날 바이러스의 동선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혹 멧돼지 족속의 억울한 죽음을 놓고 후손들이 선조들의 무지를 손가락질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으려나.

그러나 변명은 변명으로 끝나야 한다. 바이러스 전파경로는 추정만 할 뿐 증명할 수 없기에, 인간들의 추리로는 멧돼지가 ASF 바이러스를 옮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에, (멧돼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멧돼지가 관리 또는 소탕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 ‘맞다’. 사람은 돼지라는 고기를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돼지 사육을 방해하는 위험요소는 없애는 게 이 시대의 ‘합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태계 먹이사슬의 균형 차원에서 한가지는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사슬의 한토막을 끊어냄으로써 벌어질 수도 있는 재앙은 결국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어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마오쩌둥의 참새 소탕’이다.

1958년 어느 날 쓰촨성을 방문한 중국 주석 마오쩌둥은 참새떼가 벼 낟알을 쪼아 먹는 걸 보고는 “저 새는 해로운 새”라며 참새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곧바로 수도 베이징엔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설치됐고, 당간부·노동자·농민·학생 할 것 없이 모두가 빗자루와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해 참새 2억1000만마리를 소탕했다. 하지만 참새를 잡으면 쌀 수확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웬걸. 참새가 사라진 들판엔 온갖 해충이 창궐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상 초유의 기근으로 1960년까지 무려 4000만명이 아사하는 대재앙이 일어나고 말았다.

ASF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나타나 수습 좀 해줬으면 싶은 멧돼지의 해다. 멧돼지도 몰살 안 시키고 사람들도 편안할 방법은 없나. ASF 유입·전파 경로라도 알 수 있게, 개똥벌레처럼 바이러스 꽁무니에 형광물질이라도 칠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승환 (농민신문 산업부장)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추천광고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