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한글날과 농업용어

입력 : 2019-10-11 00:00


‘인경(식물의 비늘줄기)’ ‘괴경(덩이줄기)’ ‘칭량(무게 측정)’ ‘수고(나무 높이)’ ‘퇴구비(퇴비와 두엄의 통칭)’ ‘유지(웅덩이)’ ‘입체금(남을 대신해 내는 돈)’….

농업 관련 법령에 나온 용어들이다. 전문가들조차 쓰지 않는 용어이지만 법령에선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거’ ‘도괴’ ‘폐치분합’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구거(溝渠)는 급수나 배수를 위해 판 도랑을, 도괴(倒壞)는 넘어지거나 무너짐을, 폐치분합(廢置分合)은 없앰과 합침을 의미한다. 물론 법령에는 이런 설명이 빠져 있다. 한자에 정통한 이들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법령은 누구의 눈높이에 맞춰 제정됐을까.

9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73돌이 되는 날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말 경시, 한글 파괴현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에 외국·외래어가 범람한 지 오래다. 전문용어를 많이 쓰는 학술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민생과 직결된 법률분야에서까지 낯선 외국·외래어가 판을 친다.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쉬운 우리말을 두고 그러한 때가 잦다. 몇몇 법령에는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 의미 전달이 잘 안될 정도다. ‘가도(假道)’ ‘지득(知得)하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용어다.

문재인정부 들어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령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높아졌다. 변호사 출신인 문 대통령이 “제가 보기에도 난해한 법령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맞춰 법제처가 외부용역을 통해 농림축산식품부·환경부·농촌진흥청·산림청·기상청 소관 법령 중 정비 대상 용어를 파악했더니 3742개가 추려졌다고 한다. 주로 시행령·시행규칙 같은 하위법령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지금까지 진행된 법령정비사업이 주로 상위법령인 법률 중심으로 진행된 탓이다.

3742개 용어 외에도 법령에 사용된 외국어는 부지기수다. 주로 법령의 부칙·별표에 많이 들어 있다. 농기계와 농자재, 신기술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 용어들을 그대로 놔둬야 할까.

우리나라는 문화적 전통이 깊어 어지간한 농업용어에는 우리말이 있고, 한글의 접두사나 접미사를 잘 활용하면 그 뜻을 담을 수 있다. 기존에 없었던 신기술의 경우에는 전통 연장들의 이름을 활용하거나 비슷한 우리말을 적절히 변형해 쓰면 된다.

새로운 용어를 도입할 땐 우선 알맞은 우리말 표현을 찾고 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몇번 입에 오르내리면 곧 친밀해진다. 어색함의 반복은 익숙함이란 점을 잊지 말자.

한글은 우리 민족 최대의 문화유산이다. 세계에는 약 7000개의 말이 있지만, 글자는 40여개뿐이다. 이 가운데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확실한 글자는 한글이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더구나 한글에는 ‘백성이 쉽게 익히고 쓰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애민(愛民)사상이 녹아 있다. 한글의 기본 글자는 발음기관인 입술, 혀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한글에 애민사상까지 담겨 있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정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래 여러 선인이 우리 말과 글을 지켜냈다. 전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인 문자를 갖고도 굳이 의미가 불분명한 외국·외래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쉽고 아름다운 한글을 갈고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상영 (농민신문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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