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잡으라는 야생멧돼지는 못 잡고

입력 : 2021-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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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정부의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정책은 야생멧돼지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주요 감염원으로 지목된 야생멧돼지가 접경지대로부터 내려오는 걸 원천 봉쇄해 ASF 확산을 막겠다는 것이다. 환경부는 2019년부터 경기 북부에서 강원 북부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광역울타리를 치는 한편 대규모 수렵장을 운영해 개체수를 줄여왔다. 하지만 최근 광역울타리와 수렵장으로부터 수십㎞ 떨어진 양양·영월 등 강원 남부에서 발견된 야생멧돼지 폐사체가 ASF 양성으로 확인됐다.

한 동물감염병 전문가는 “설악산국립공원까지 뚫리면서 이제는 전국이 ASF 위험지역이 됐다”며 “내일 당장 언제 어디서 바이러스가 검출돼도 놀랄 일이 아니다”고 얘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울타리 관리 부실, 수렵인 방역 미흡 등 수차례 문제점이 지적됐는데도 당국은 효과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오히려 바이러스 확산을 부추겼다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한 야생동물 전문가는 “야생멧돼지는 보통 한달에 10여㎞를 이동하는데, 최근 비정상적으로 먼 거리까지 움직이는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면서 “대규모 수렵으로 개체수가 줄어든 야생멧돼지가 짝짓기 상대를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정부는 다소 억울할 수 있겠지만 광역울타리 설치 등에 수백억원을 투입하고도 ASF의 전국 확산 위험에 놓이게 만든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더욱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린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최근 영월·양양의 야생멧돼지 ASF 발생과 관련해 인접 시·군에 사육돼지의 예방적 살처분까지 권고했다는 내용이다. 농가 입장에선 “잡으라는 야생멧돼지는 못 잡고 애먼 집돼지를 잡으려는 셈이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살처분은 필요할 땐 반드시 해야 하지만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임을 잊어선 안된다. 특히 야생멧돼지 관리에 실패한 정부가 살처분을 바로 꺼내 들었다는 점에선 책임전가로까지 느껴진다. 야생멧돼지는 환경부 소관, 집돼지는 농식품부 소관이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ASF 중앙사고수습본부는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전문가들은 “ASF 전국 확산 가능성이 커진 만큼 이제는 개별 양돈장의 방역 강화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의 조언대로 지금은 양돈장 방역에 빈틈이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메울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먼저다. 정부가 바이러스 잡겠다고 양돈농가를 잡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김재욱 (산업부 차장) kjw89082@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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