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신선채소 저장금지법’이라도…

입력 : 2019-09-11 00:00


“거참, 많이도 잘랐네요.”

고랭지무 주산지를 돌아보고자 8월 강원 평창군 진부면과 정선군 임계면 일대를 찾아 부지런히 차를 몰고 있을 때였다. 일정상 기자와 동행하던 사람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가 바라보는 쪽엔 눈으로 대충 어림잡아도 1652㎡(500평)는 넘어 보이는 광활한 무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무들은 이미 예초기의 날카로운 칼날에 윗동이 모두 잘린 상태였다. 기자는 급히 차를 세우고 밭으로 다가섰다. 어느새 폭염에 짓무르기 시작한 무에서 나는 악취가 ‘훅’ 하고 코를 찔렀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일제히 목들이 달아난 고려시대 어느 불상군(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평창군 진부면으로 시집와 43년째 남편과 무농사를 지어왔지만 이번처럼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는 한 여성농민은 “시장에 내놔봤자 빚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산지폐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푼돈이나마 벌겠다며 국도변에 천막을 치고 매일 무·배추를 팔고 있었지만 차를 멈추고 내려 무를 사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덜렁 취재만 하고 일어서기 미안해 무 4개를 3000원에 샀다. 더 필요하면 밭에 들어가 가져가라는 말이 민망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고랭지배추 재배농가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짙푸른 배추의 향연을 머릿속에 그리며 국내 최대 규모의 고랭지배추 주산지인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를 찾았지만 곳곳엔 방치된 채 썩어가는 배추들 뿐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은 하나같이 노지 무·배추의 저장량 증가를 문제 삼았다. 남쪽지방에서 봄부터 생산된 노지 무·배추 잔량이 저장시설로 대거 들어갔다가 다시 시장에 나오면서 고랭지채소의 가격하락을 부채질하고 있어서다. 농민들은 “소비부진 등으로 안 팔린 농산물은 폐기처분해야 제철농산물 판로가 열린다”며 “저장고를 지어놓고 보관한 물량을 계속 출하하는 건 결국 다같이 죽자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무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8월 농업관측’에 따르면 올해 노지봄무 저장량은 평년 대비 2배 이상 많은 1만4300t에 달했다. 최근 1만9834㎡(6000평)에 달하는 무밭을 갈아엎은 한 농민은 “이쯤 되면 ‘신선채소 저장금지법’이라도 제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올해 우리 농촌은 물량과잉에 따른 마늘·양파 값 폭락을 뼈아프게 겪었다. 고랭지 무와 배추도 마찬가지다. 특히 무·배추는 산지별로 네 작기가 연중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한곳에서 삐끗하면 수급안정에 적신호가 켜진다. 그만큼 적정생산량 유도가 필요하고 수급안정대책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지금 고랭지채소 산지 농민들은 풍년의 기쁨 대신 눈물을 머금고 자식같이 키워온 농작물을 자기 손으로 망가뜨리고 있다. 이 역설을 이젠 그만 보고 싶다.

김윤호 (농민신문 전국사회부 기자) fact@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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