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포장’ 농산물에도 생산연도 표시? “현실성 없고 유통비만 오를 것”

입력 : 2021-06-09 00:00 수정 : 2021-06-09 23:21
내년 1월부터 일부 직거래 농산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선농산물 비닐 포장제품에 생산연도나 생산연월일을 쓰도록 한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가 알려지면서 농산물 특성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신선농산물 생산연도 표시 논란] 농업계 목소리 들어보니

눈으로 신선도 확인 가능한데 포장 설비 등 추가비용 더 들어

미국·유럽, 원산지 정도만 표시 

저장 농산물 버리는 물량 늘어 음식물 폐기 축소정책 ‘엇박자’ 

농식품부 “식약처, 도둑 처리 산지 부정적 견해 지속 전달”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식품 등의 표시기준’ 고시는 농업 현실, 농산물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는 게 농산물 산지 관계자와 유통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가 수립돼 시행을 앞둘 때까지 농산물 생산·유통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뭐 했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산지 “황당 그 자체”=그동안 신선농산물은 비닐랩 등 투명하게 포장했으면 육안으로 신선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만큼 생산연도나 생산연월일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식약처는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며 신선농산물에 대해서도 생산연도·생산연월일 한글표시를 내년부터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지난해 5월12일 관련 고시를 바꿨다.

대부분의 산지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게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박진석 제주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 상무는 “수년 전 일부 냉동 수산물 유통이 문제가 되면서 소비자 권익을 대변하는 일부 언론에서 생산연도 또는 생산연월일을 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을 기억한다”면서도 “그게 과연 현실화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1년 전에 이미 고시가 개정돼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감귤·겨울무 등 해를 넘겨 수확하는 농산물의 수확 날짜를 어떻게 구분해 표시하며, 이는 도·소매가 엄연히 구분돼 있는 유통 현실에서 어느 한쪽의 유통 주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뿐”이라고 꼬집었다.

김영진 한국양파연합회 의무자조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은 “저장출하 기간이 길다는 양파도 6월에 생산해 이듬해 3월이면 모든 소비가 끝난다”면서 “생산연도를 구분해 표시하는 게 무슨 실효성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공산품에나 적용해야 할 내용을 농산물에 적용한 것은 식약처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재욱 대구경북능금농협 문경거점산지유통센터장은 “사과는 햇사과를 제외하고는 저장사과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연산 표시를 했다고 해서 재고 농산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며 “그렇더라도 생산 연도·일자 표시가 소비촉진 등 산지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농산물을 혼합해 판매할 때도 ‘답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채소샐러드나 밀키트(Meal Kit·반조리식품) 등 생산연도가 다른 농산물이 섞인 농식품은 표시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실효성 없는 생산연도 표시=전문가들도 실익이 없다고 일축한다. 김동환 안양대학교 교수(농식품신유통연구원장)는 “비용 대비 편익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쌀만 하더라도 품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도정일자인데 이는 지금도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여기에 생산일자(또는 연도)를 표시하라고 하면 이중규제일 뿐 아니라 정보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또 “소규모 영세농가는 표시작업에 드는 비용과 인력 등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병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업 현실과 농산물 특성을 무시한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면서 “일부 농산물을 제외하면 해를 넘겨 소비하는 일이 많지 않고 가공식품과 달리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을 소비자가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새로 한글표시를 하려면 포장 설비·라벨 구입에 추가 비용이 들고 일거리도 늘어나 유통 비용이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제도여서 해외에서도 농산물에 생산연도를 표시하도록 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음식물 폐기량을 줄이려는 정부 정책과 엇박자라는 지적도 있다. 박태균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는 “농산물은 소비자가 육안으로 봐도 상품의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미국·유럽 등 농식품 표시제도가 발달한 나라에서도 대부분 농산물에 원산지 정도만 표시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당 제도가 도입되면 저장 농산물은 재고 상품으로 여겨 폐기되는 물량이 늘어날 수 있어 음식물 폐기량 감축을 위해 소비기한 도입 등이 활발히 논의되는 현재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식품부의 안이한 대처도 ‘도마 위’=고시가 개정돼 1년이 지날 때까지 농식품부는 뭐 했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생산 단계 농산물을 식품 규제 영역으로 호시탐탐 편입하려는 식약처의 움직임에 어수룩하고 안일하게 대처해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농식품부 내부에선 “‘식약처의 도둑 처리’로 우리도 뒤통수를 맞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식품 표시업무가 식약처 소관인 만큼 적극적인 대처가 쉽지 않다”며 “2017년부터 식약처가 관련 고시 개정 방침을 밝혀 농식품부 차원에서 산지 입장을 내세워 부정적인 견해를 지속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고시 개정에 앞서 2019년 10월 행정예고를 했는데 행정예고안에는 신선농산물의 생산연도·생산연월일 표시 면제 조항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행정예고가 끝나고 5개월 뒤 현재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행정예고를 믿고 안심했는데) 그 와중에 업무 담당자가 두세번 바뀌고 담당 계도 변경되면서 2020년 5월12일 고시가 개정됐을 당시 식약처로부터 어떠한 얘기도 듣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소영·양석훈 기자 spur222@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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