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서 쌀시장 개방 소식 듣고 충격…삭발·혈서로 항의”

입력 : 202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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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증인이 말하는 UR 협상장 밖 분위기 - 조웅래 전 양주 남면농협 조합장

개방 반대 1300만명 서명 들고 농민대표단 일원으로 스위스행

 

“쌀시장 개방 소식에 망연자실했지만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이 모두에게 있었죠.”

조웅래 전 경기 양주 남면농협 조합장(75·사진)은 28년 전 머나먼 이국 땅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쌀시장 개방 담화를 들었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정부가 쌀시장 개방을 결정한 1993년 12월9일, 그는 농협 농민대표단의 일원으로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다. 한호선 당시 농협중앙회장 등 18명으로 결성된 농민대표단이 쌀시장 개방만은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한창 이뤄지던 제네바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을 때 그는 울분에 차 “‘쌀 수입개방 반대 서명운동’ 서명부가 담긴 보따리는 뭐 하러 다시 메고 한국에 돌아가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UR 협상 때문에 만들어진 명부니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본부에 내던져 강력하게 항의의 뜻이라도 전하자”고 요구했다. 1991년 UR 협상 방향이 ‘예외 없는 관세화’라고 알려진 이후 농협은 쌀만은 절대 개방해선 안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그해 11월 쌀 수입개방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42일 만에 1307만8935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농민대표단은 이 서명부를 제네바에 챙겨 갔다.

조 전 조합장은 단순히 서명부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삭발시위를 제안했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삭발을 했단다. 순식간에 맨머리가 된 채 나타난 그를 보면서 다른 농민대표단원도 삭발행진을 이어갔다.

이튿날 농민대표단이 삭발한 채 가트본부 앞에 나타나자 많은 내외신은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농민대표단은 서명부를 가트본부 정문 앞에 쌓아둔 채 성명서를 낭독한 뒤 ‘쌀 개방 결사반대’라는 혈서도 써 내려갔다.

그는 “집회 허가를 받지 않고 벌인 기습시위인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우리의 주장을 펼 수는 없었지만, 우리 600만 농민의 울분을 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삭발시위를 함께했던 이들과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삭발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만나 당시를 자주 회고했다고 한다. “농협이 농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제네바까지 쫓아갔기에 협상에서 한국 쌀이 그나마 특별대우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양주=오은정 기자 onjung@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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