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곳 없는 ‘우리밀’…창고에 쌓여만 간다

입력 : 2018-08-08 00:00 수정 : 2018-08-09 09:35
강득진 경남 사천 사남농협 조합장(맨 왼쪽)이 사일로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창고에 쌓여 있는 밀 톤백 앞에서 재배농민들과 재고처리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천=김도웅 기자

정부의 자급률 제고 발표에 농가들 몇년 새 생산량 늘려

최근 경기침체로 소비 뚝 산지 농협에도 재고 넘쳐나

소비대책 없어 생산기반 휘청 무이자자금 지원 등 서둘러야
 


밀 재배농민들이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우리밀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정부 발표를 신뢰해 생산량을 늘렸지만 판매가 안돼 재고를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을 방치하면 우리밀 생산기반 붕괴는 물론 밀 재배농민들이 대거 보리로 작목을 전환해 농정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농가 판로 없어 재고물량 처리 ‘전전긍긍’=전북 고창에서 1992년부터 밀농사를 지어온 이병수씨(55·고수면 예지리)의 창고엔 올 6월에 수확한 밀 32t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이씨는 그동안 생산한 밀을 한국우리밀농협(조합장 천익출)과 국립종자원에 납품해왔다. 하지만 최근 경기침체 등으로 소비가 위축돼 수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올해는 재고물량을 창고에 그저 보관만 하고 있다. 이씨는 계약재배한 물량 5t을 포함해 수확 후 두달이 가깝도록 올해산 밀을 한톨도 판매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의 토지임대료 4500만원을 포함해 생산비 부담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씨는 “2017년 파종면적을 줄였지만 어렵기는 매한가지”라며 “아직까지 지난해 납품한 밀값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올해 논 8595㎡(2600평)에서 밀 4t을 생산한 양삼차씨(60·공음면 칠암리)도 “15년 동안 밀농사를 지으면서 올해처럼 판로가 없어 막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는 2008년부터 중장기적으로 우리밀 자급률을 2020년까지 5.1%, 2022년에는 9.9%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결과 우리밀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경기침체 등으로 소비가 줄면서 자급률은 2017년 0.9%로 2016년(1.8%)보다 오히려 낮아졌다.

광주광역시와 전남북지역 2050여 밀 생산농가와 계약재배하고 있는 한국우리밀농협도 정부 발표를 믿고 수매물량을 몇년간 크게 늘렸다. 하지만 현재 2017년산 7000t이 재고로 쌓여 있고, 수매값 16억원도 농가에 지급하지 못한 상황이다. 올해도 계약재배물량 4000t을 합쳐 모두 1만1000t의 물량을 처리해야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한국우리밀농협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에 한국우리밀농협은 2019년부터는 계약재배가 아닌 수탁판매 방식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생산 장려보다 소비·판로 대책 절실=경남지역 밀농가도 사정이 비슷하다. 경남 사천 사남농협(조합장 강득진)은 우리밀 자급률을 높이자는 취지로 2008년 밀 종자 보급을 시작해 11년째 우리밀 생산에 앞장서고 있다. 올해 수확량을 700t으로 예상했지만 작황이 좋아 1100t이나 생산됐다. 하지만 계약재배 물량 600t마저 거래처에서 가져가지 않아 사일로에 쌓여 있다. 지난해 수매한 1800t 중 출하가 완료된 물량은 100t에 불과하다.

구소효 사남농협 총괄상무는 “재고가 3000t 가까이 돼 보관할 공간도 빠듯하다”면서 “부패방지를 위해 사일로에 1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냉각기까지 설치했는데 관리비용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경남 합천 우리밀영농조합은 판매처가 확보되지 않아 올해 우리밀 계약재배를 아예 포기했다. 지난해 350여농가에서 1200t을 수매해 주식회사 우리밀, 아이쿱생협, 밀다원 등에 납품했으나 아직 재고량이 500t에 이른다.

김석호 합천 우리밀영농조합 상임이사는 “정부가 생산계획만 세워놓았지 실제 소비대책은 거의 내놓지 않고 있다”면서 “밀 생산 직불금을 올려 수입 밀과의 가격 차이를 줄여준다거나 홍보를 강화해 소비자가 우리밀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정부의 대책을 호소했다. 김 이사는 “민간단체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밀 자급률을 2006년 0.2%에서 2016년 1.6%까지 높여놓은 상황이지만, 소비대책이 없어 이제는 생산기반까지 무너질 지경”이라며 “일본의 경우 밀 수입업자로부터 밀 진흥비를 확보하고 국가 예산을 지원한 결과 외국산 밀과 자국산 밀이 같은 가격에 경쟁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도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익출 조합장도 “우리밀 생산기반 붕괴는 외국산 밀에 대한 의존도를 급격히 높임과 동시에 보리 등 타작물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정부가 우리밀 수매단체에 무이자자금 지원 등을 통해 우리밀 수매물량 및 판로 확대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창=김윤석, 광주=이문수, 사천·합천=김도웅, 김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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