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느티나무 그늘 정자에선 도란도란 날마다 이야기꽃이…

입력 : 2017-08-11 00:00

정자 품고도 남을 넉넉한 느티나무 그늘…주민들에겐 최고의 안식처

저마다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내기 화투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라
 



사람 사는 데라면 어디든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 있다. 논두렁에 놓은 불길처럼 소문의 연기가 피어나기도 하고, 애경사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기도 한다. 세상과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곳. 바로 느티나무 아래 ‘정자’다. 그 마을을 알고 싶다면 정자를 찾아야 한다. 느티나무가 멋진 마을의 이야기가 궁금해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로 떠났다.


정자는 마을 중간쯤, 600년 넘게 산 느티나무 고목(古木) 아래 있었다.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무는 정자를 품고도 남을 큰 그늘을 내주고 있었다.

“여기는 다른 정자하고 다르니더. 큰 나무 아래라 바람이 에어컨보다 시원해여. 그러니 맨날 안 나올 수 있니껴.” 오후 1시 30분. 김길동 노인회장(73)은 한명씩 모여드는 노인들을 반갑게 맞는다. 사실 김 회장은 이곳 토박이가 아니다. 이전해온 ‘수몰민’이다.

안동댐 착공 때 정든 마을을 뒤로 한 채 이 마을에 정착했다. 얼마 전 가뭄에 가봤더니 살던 마을이 47년 만에 바닥과 함께 드러났다. 내려다보니 기가 막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단다.

“여기 와서 처음에는 논밭농사 쪼금 하다가 낙농하는 신씨, 저분한테 귀동냥해가지고 젖소를 키웠지.” 김 회장이 신응갑씨(76)를 가리키자 이야기는 그 시절 젖소이야기로 이어진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절

“1970년대 초창기 외국에서 도입한 소를 들여와 키우는데 제대로 된 기술이 있었니껴. 풀만 멕이면 되는 줄 알고 죽도록 꼴만 베다 멕였지. 그래도 안돼.” 낙농기술도, 착유시설도, 운송시설도 없던 시절이라 고생도 많이 했다.

“실컷 짜 놓으모 소가 이래 발을 ‘퉁’ 담가 버래. 그라모 우유통에 똥이 둥둥 뜨고 그랬어. 다 갖다 버려야지, 어예.”

그래도 그때는 우유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나쁘지는 않았다고들 입을 모은다. 신씨는 그렇게 평생을 해오던 낙농업을 2011년에 접어야 했다. 최악의 구제역이 전국을 휩쓸었던 해. 안동댐 상류지역이라 규제까지 심한 탓이었다.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거라는 말에 “구제역 보상금은 받았어.” 신씨가 읊조리자 누군가 되받는다. “받으면 뭐해. 자식들한테 다 줬겠지.” 신씨는 그 시절을 견디며 낙농업으로 5남매를 키웠다.

 

오늘은 안동장날이라 마을 어르신들이 오붓하게 모였다. 느티나무 아래 정자는 장터 오가는 길목에 있어 이야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자는 동네 사랑방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시선이 일제히 김규선씨(74)에게로 쏠린다. 김씨의 아들이 육군 대령으로 승진한 것이다. 한쪽에서 “동네잔치는 언제 할 거냐”는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씨가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연다. “취임식에 갔는데 별자리(사단장)가 일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니는 역시 촌놈이야’ 이러는 거야. 그 소리를 듣는데 그냥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촌놈 특유의 근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다른가보다. ‘촌놈’이라는 말에 괜히 자식한테 미안한 마음이 앞섰을 게다.

그러자 김 회장이 거든다. “사단장도 한두세대만 올라가면 다 농사짓고 살았지 뭐. 천년 전이나 천년 후나 농민이 나라의 기본이야! 안동은 농부가 상놈이면서도 양반인 곳이야. 안 그러니껴?” 정자에 환한 웃음꽃이 핀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곳

“조씨는 한 사나흘 못 본 거 같네. 뭔 일 있니껴?” 김씨가 주위를 둘러본다. 이틀이나 사흘 전에 봤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오늘은 안동 5일장이 서는 날이다. 평소 같으면 10여명이 모이는데 오늘은 대여섯명뿐이다. 장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 며칠째 보이지 않으니 걱정부터 앞선다. 모두가 고령이니 하루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될 수밖에. 봤다는 사람들 소리에 김씨는 비로소 안도한다.

“여기가 옛날에는 장날 다니던 길목이라 사람들이 북덕북덕했었니더. 위로는 예안장, 아래로는 북후장, 이 길을 안 지날 수 없었지. 소몰이꾼도 수두룩했어.” 지금은 70여가구가 살지만 그 시절에는 130여가구가 살았다. “가구수만 가지고 사람수를 계산하면 안돼여. 지금은 한가구에 한두명이지만, 그때는 한가구에 평균 열명은 됐더랬니더.” 그때는 마을에 양조장이 하나, 막걸리집이 다섯군데나 될 정도로 번성했었다. 김씨가 정자 옆에 한 집을 가리키며 “저 집이 유명한 주막이었니더.” 초라한 집이 옛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루가 완성되는 느티나무 아래, 정자

주민들은 새벽에 일어나 밭에 들러 풀도 뽑고 약도 치고 10시 정도까지 일을 한다. 집에서 잠시 쉬다가 점심 먹고 모두들 정자에 모인다. 그렇게 대여섯시까지 농사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 ‘자장면 내기’ 화투도 친다. ‘잘못 냈다’는 소리에 ‘낙장불입’이라며 큰 소리도 오간다. 20분가량 걸리는 곳에서 오는 자장면이 성할 리 없다. 하지만 참(?)으로 먹는 자장면은 언제 먹어도 일품이란다.

그 사이 ‘생물오징어 세마리 만원, 고등어·갈치 3000원’을 외치는 부식 트럭이 들러 “뭐 필요한 거 없니껴?” 어르신들 안부를 묻는다. 부식 트럭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뒤이어 택배차가 들어와 택배물이나 송장을 전해준다.

한사람씩 다시 밭으로 나가는 해거름 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며 뜨거워진 대지도 식어간다. 오늘의 이야기도 육백년 느티나무는 들었을 것이다. 끝없는 이야기를 듣느라 고목도 노곤했는지, 지는 해에 그림자로 길게 드러눕고 있다.

글·사진=김도웅 기자 pachino8@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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