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사람 품은 ‘비둘기 숲’, 도자기 역사에도 한획

입력 : 2022-05-09 00:00

[최석호의 골목길] ② 전남 영암 구림마을 신비한 길

신라 도선 국사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던 곳인 ‘국사암’

삼국시대 당나라·아라비아 상인들 드나들던 ‘상대포’

조선 예송논쟁후 유배 온 김수항이 이름지은 ‘죽림정’

방엔 ‘호남 없으면 나라 없다’ 의미 담긴 이순신 편지

청자 제작 직전단계 ‘시유도기’ 신라 교역품으로 사용

한국전쟁때 인민군 손에 순교한 기독교신자 기념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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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 구림마을 안에 죽림정(맨 앞 오른쪽 건물). 영암으로 귀양 온 문곡 김수항이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죽림정이라 이름 지었다. 영암=현진 기자

“무거워서 1000명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금강산이라 일컫던 월출산 구정봉 아래 있는 이 바위를 동석(動石)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신비한 바위’라고 했다. 이것이 고을 이름이 됐다. 전남 영암(靈巖)이다.

“신라 사람 최씨 집 정원에 외(오이) 하나가 열렸다. 길이가 한자도 넘었다. 최씨 집 딸이 몰래 외를 따 먹었는데 임신을 했다.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부모는 아이를 대숲에 버렸다. 딸이 몰래 가서 보니 비둘기와 부엉이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부모는 이상히 여겨 데려와서 길렀다. 자라서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도선(道詵) 국사다. 도선은 태어난 마을을 비둘기 숲, 구림(鳩林)이라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570쪽)

이번에는 비둘기가 국사를 지켜낸 영암 ‘비둘기 숲’ 마을에 펼쳐진 신비한 길이다. 마을이 시작되는 곳 국암서원 국사암에서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바다를 주름잡았던 상대포를 거쳐 죽림정·하정웅미술관·영암도기박물관 등을 차례로 둘러보고 구림공업고등학교 옆 순교자기념관에서 골목길 여행을 마무리한다.


버려진 아이가 나라의 스승이 되다

버려졌던 아이가 나라의 스승(국사·國師)으로 자랐다. 아이를 버렸던 곳을 나라 스승 바위, ‘국사암(國師庵)’이라 했다. 국사암 옆에 국암서원이 세워졌다. 국암서원 강학당(講學堂)인 덕성당에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이 ‘조천덕성(朝川德星)’이라 쓴 편액(扁額)을 걸었다. 동방의 인재들이 지혜를 갈고닦아 별처럼 빛나라는 뜻일 터. 위창은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시조인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아들이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이다. 우리나라 대표로서 미군정으로부터 대한제국 옥새를 돌려받았던 장본인이다.


해상 실크로드 상대포

국암서원을 나오면 큰 저수지가 있다. 상대포 유적지다. 간척사업으로 저수지가 됐지만 상대포는 삼국시대 당나라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던 서남해 최대 항구였다.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줬다는 왕인 박사가 이곳에서 배를 탔고 최치원 선생 역시 여기서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상대포는 통일신라 때는 호남에서 거둔 세곡을 구림마을 창고에 저장했다가 울산으로 가는 배편으로 일차 운반하고 재차 육로를 거쳐 경주로 가는 출발지였다.

상대포에서 바닷길로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더 가서 가거도에 이르러 북동풍을 타고 3일을 가면 중국 땅에 닿았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서 7일 만에 구림마을 상대포에 이르러 뭍에 올랐다고 한다.


죽림칠현을 빗댄 죽림정

서인과 남인은 두차례 예송논쟁을 했다.

현종 1년(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쟁론한다.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숙종 1년(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또 한차례 격돌한다.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제왕가를 받들고자 했던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했지만, 왕과 사대부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서인은 대공복(6개월)을 주장했다. 대공복으로 하면 현종 아버지 효종이 서자가 돼버리기 때문에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덕원(함경남도 문천·원산 일대)으로,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을 영암으로 유배 보냈다.

1675년 영암으로 귀양 온 좌의정 김수항은 구림마을 대숲가에 대나무 집을 지었다. 바람에 부딪히는 대숲 소리가 마치 옥이 구르는 것 같다고 풍옥정(風玉亭)이라 했다.

이 마을 연주 현씨 15세손 현건(玄健)의 손자 현징(玄徵)이 숙부의 허물어진 별장 취음정을 옮겨 짓고 김수항에게 정자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중국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죽림정(竹林亭)이라 이름 짓고 <죽림정기>를 썼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죽림정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 장군이 군자주부(軍資主簿) 현건에게 보낸 편지 4통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 3통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현건의 삼촌뻘인 현덕승은 울산 판관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이순신 장군이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한통 속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뜻이다. 인심과 비옥한 대지 때문이었을까.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진영을 한산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호남으로 가는 해로를 차단하려는 이순신의 전략이었다.


하정웅과 하정웅미술관

‘상처 받고 아픈 인간을 이해하는 긍휼한 기도 정신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바로 이 기도 정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작품을 모은 수집가가 있다. 재일교포 하정웅이다. 하정웅은 1939년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에서 하헌식과 김윤금의 다섯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헌식은 16살 되던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식민노동자로 살았다.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하정웅은 아키타 시내 여덟개 고등학교 미술부 연합회장을 맡으면서 지역의 사계절을 그림에 담았다. 1963년 윤창자와 결혼을 하고 도쿄 사이타마현에 있는 가와구치시에 작은 가전판매점을 연다. 1964년 도쿄올림픽 특수를 누린다.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는 와중에 시작한 부동산사업까지 성공하면서 거부가 된다.

아버지와 함께 고향 영암을 찾은 것은 하정웅이 34세 되던 1973년이었다. 온 가족들은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하정웅은 그제서야 자신의 고향이 영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영암에 다녀온 지 2년 뒤 아버지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고려청자의 원형, 구림마을 시유도기

구림마을 시유도기(施釉陶器)는 일본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도기에서 자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나왔다. 또한 청자 제작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구림마을 시유도기는 고려청자가 탄생하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신라가 해상권을 장악했을 때는 장보고 선단이 이곳 마을에서 생산한 도기를 교역 물품으로 사용했다. 장보고 유적지인 완도 장군섬 토층 맨 밑에서 구림도기가 출토된 것이 그 증거다.

신라는 670년부터 676년까지 6년간 모두 22차례 전쟁을 하며 당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해전을 많이 치렀던 까닭에 당나라 군대는 구림도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각편병을 발굴한 것과 당나라 동관요(銅官窯)와 비슷한 모양의 도기 유물을 발굴한 것이 그 증거다.


순교자기념관

1950년 7월27일 경찰과 인민군 사이에 한차례 교전을 벌인다. 이어서 인민군이 영암으로 들어왔다. 9월15일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하면서 한국전쟁 상황은 일시에 역전된다.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한다. 구림마을을 점령했던 인민군은 퇴로가 막히면서 산세가 험한 월출산으로 숨어든다. 뒤처리를 하던 인민군 잔당은 10월3일 교회를 불태운 데 이어 10월7일 지와목에 있는 주막에 성도 6명을 비롯해 26명을 가두고 불을 지른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준다고 했지만 성도들은 목숨과 신앙을 맞바꾸지 않았다.

영암읍교회 그리고 상월교회·구림교회·천해교회 신자 등 모두 87명이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첫 순교지 영암읍교회 마당에 있는 순교비와 구림공업고 왼쪽 언덕 위 순교비·순교자기념관은 그래서 더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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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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