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호 반짝이는 물비늘·누그러진 햇살…짙어지는 가을향기

입력 : 2019-11-08 00:00 수정 : 2019-11-09 23:54

[村스러운 걷기 여행] 전남 장성호 수변길

전원주택 들어선 수성마을서 시작 잔잔한 호수 보며 느려지는 발걸음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면 아름다운 풍광·선선한 공기 이 계절의 선물 만끽할 수 있어

백미는 종착점에 자리한 양조장

저온발효해 풍미 다채로운 전통주 직접 맛보고 술 빚기 체험도 가능
 


노랗고 붉게 물들어야만 가을이 왔다고 할 순 없는 일이다. 아직 단풍이 오지 않았거나 지나간, 또는 본래 단풍이 자리하지 않은 곳들. 그곳들도 어김없이 가을을 마주한다. 이맘때 전남 장성군 장성호 수변길엔 조금씩 옅어져가는 풍경이 있다. 물들지 못하고 단지 바래지더라도, 그래서 헛헛한 이 계절이 더 묻어난다.



호수를 바라보는 귀촌 마을

통유리에 비친 책장. 단정하게 깎인 잔디. 길의 시작점인 북이면 수성마을엔 누구나 한번쯤 살고 싶어 할 법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엔 원래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1976년 장성댐이 생기며 수몰돼 대부분 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계속 살고 있는 토박이는 두어가구 남았단다. 나머지 십여가구는 타지에서 귀촌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너무 좋죠. 여긴 봄과 가을이면 천국이에요. 여름엔 조금 습하고, 겨울엔 눈이 너무 많이 오긴 하지만요.”

집에 놀러온 지인들과 함께 마을을 산책하던 귀촌인의 말이다. 남동쪽으론 물이, 북서쪽으론 산이 에워싼 마을. 으레 멋진 전원주택이 들어선 곳들이 그렇지만, 이곳 또한 주변 풍광이 사람을 부른다. 왼편에 호수를 끼고 조붓하게 난 오솔길을 걷는다. 갈색 낙엽이 밤송이와 뒹구는 흙길 바로 옆으로 잔잔한 호수가 붙었다. 장성호의 너비는 그리 넓지 않아 맞은편 산 또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겹겹이 솟은 예닐곱의 산봉우리가 잔잔한 물결을 고즈넉하게 품었다.
 

수변길 끝자락에서 만난 붉은 백일홍과 박각시.



빛바랜 녹음 우거진 호숫가 따라

뭉근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수면 위에서 넓게 부서진다. 우거진 나무 너머 반짝이는 물비늘. 드문드문 걸리는 그 광경을 보느라 걸음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다. 그러다보면 더 많은 것이 다가온다.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한철 짙었을 녹음에는 누런 기운이 스며 있다. 여전히 저 빛을 초록이라 할 순 있겠지만, 그 기세가 누그러진 가을 햇볕을 닮았다. 이 길 위에선 잠시 쉬었다 가길 권한다. 걸음에 치여 흩어질 감상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담아볼 수 있으니. 중간중간 벤치가 있어 앉았다 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선선한 공기는 이 가을이 주는 선물이다.

계속 길을 가다보면 제2출렁다리 공사구간에 접어든다. 기존의 출렁다리에 더해, 바로 옆 골짜기에도 새로운 다리를 짓는 것이다. 해당 공사로 기슭을 두르는 일부 구간이 폐쇄됐다. 덕분에 걸음이 잠시 비탈진 산길로 이어진다. 숨이 꽤 찰 테지만 불편한 이 길 또한 올라봄직하다. 가까이서 물결 치던 호수의 경치가 너른 시야에 담겨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수의 끝자락엔 활짝 핀 백일홍 군락이 반긴다. 나비와 벌, 그리고 분주하게 날갯짓을 하는 박각시가 시선을 또 한차례 훔친다.

 

양조장 청산녹수에서 주현목 연구개발부장(왼쪽)이 저온발효해 만든 막걸리를 소개하고 있다.


느릴수록 다채롭다는 것

이 길의 백미는 종착점에 있다. 백일홍 군락을 지나 찻길을 걷다보면 ‘청산녹수’라는 양조장에 다다른다. 이곳은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시골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폐교된 작은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해 만든 술 익는 공장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양조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국산 쌀과 누룩으로 빚은 프리미엄 막걸리를 시음해볼 수 있다. 만약 10명 이상의 단체라면 사전 예약(☎061-393-4141)을 통해 술 빚기 체험도 신청 가능하다. 다양한 술을 직접 맛보고 마음에 드는 제품을 구매해도 좋다.

“술이 가장 잘 익는 온도는 25℃ 정도예요. 다만 그 온도에선 빨리 익을 뿐 다양한 맛을 담아내진 못합니다. 저희 술은 15℃로 저온발효하는 게 특징이죠. 그럼 양조기간은 두배로 늘지만 다채로운 풍미가 술에서 피어납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빠르면 그만큼 놓치는 게 있다는 것. 느리면 그만큼 더 채울 수 있다는 것. 자연의 이치란 건 대개 다 통하는 모양이다. 살짝 오르는 탄산에 과하지 않은 신맛, 달콤한 향기가 부드럽게 넘어간다. 은은하게 스쳤던 이날 호수변의 가을이, 느리게 익은 술 한잔에 얼근하게 배어든다.

장성=이현진, 사진=김덕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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