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대비 철인왕후…궁중생활 내내 검소한 삶

입력 : 2020-04-15 00:00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43)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30)철인왕후 김씨

안동 김씨 세도정치 절정 때 책봉 같은 가문 순원왕후 영향력 절대적

온화한 성품에 상당한 교양 갖춰 3명의 대비 모시며 조신하게 지내

혼례 7년 만에 낳은 원자, 이듬해 사망 큰 존재감 없이 생활…42세 때 승하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농사를 짓다 순원왕후의 지명으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점 때문에 왕으로서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다. 철인왕후 김씨는 그런 철종의 왕비로 들어와 자식마저 없어 그에 대해서도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가장 정점에 이르던 19세기 중반 왕비로 들어와 대내외적으로 험난했던 시기를 거쳐갔던 철인왕후의 삶으로 들어가보자.

철인왕후(哲人王后 : 1837~1878년) 김씨는 안동 김씨 김문근(金汶根 : 1801~1863년)과 여흥 민씨의 딸로 1837년 3월23일 한양 순화방(順化坊)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묘지문(墓誌文)에 의하면 “점점 자라면서 침묵하며 말이 적었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덕과 도량이 일찍 성숙해 근엄하기가 마치 어른 같았고 내외 친척들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매우 내성적이고 온화한 품성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1849년 6월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에서는 후계자 문제로 고민했다. 당시 왕위 계승의 최고 지명권자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였다. 순원왕후는 정조 대에 역모 혐의로 강화도에 유배를 갔던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의 손자 원범(훗날 철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왕이 됐을 당시 철종의 나이는 19세로, 이미 혼인 적령기를 넘어섰지만 미혼인 상태였다. 왕실에서는 철종의 혼례를 서둘렀고 1851년 철인왕후는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됐다. 철종은 21세였다.

그가 왕비로 책봉된 것은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안동 김씨 출신 순원왕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효현왕후에 이어 철인왕후를 배출함으로써 순조·헌종·철종 3대 왕의 왕비를 모두 안동 김씨 가문에서 배출하게 됐다.

부친 김문근은 철종 대에 금위대장·총융사·훈련대장 등 군사의 요직을 차지했고, 동생 김병필(金炳弼)은 30세에 판서가 된 후 좌의정을 지냈다.

그가 초간택을 받기 전 며칠 동안 “상서로운 무지개가 연달아 대청 앞 물 항아리에 보이고 온 마을을 한 광채가 가로지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삼간택 후 어의동 별궁에서 거처할 때는 “<소학>을 받아서 한번 문장의 뜻을 해석하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 거침없어서 막히는 데가 없었다. 몇달이 못돼 문리(文理)가 크게 통했으나 오히려 만족하지 못한 듯 자신만만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보듯 상당한 교양을 갖췄음을 볼 수가 있다.

왕비가 됐지만 그 위로 순원왕후·신정왕후·효정왕후 등 3명의 대비가 생존해 있어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3명의 대비를 극진히 모시면서 조신하게 지내야만 했다. 자식을 낳지 못해 마음을 졸이는 시간도 많았다. 1858년 10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원자를 출산했지만, 이듬해 사망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면서 대비의 지위에 올랐지만 신정왕후와 효정왕후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옷은 비단을 입지 않았고 다만 겨울에는 무명옷을, 여름에는 모시옷을 항상 입었는데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덕은 자못 옛날 왕비들에게도 없었던 일이었다”라는 묘지문의 기록을 통해 다른 왕비들과 달리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남편인 철종처럼 큰 존재감 없이 조용히 궁중생활을 하던 철인왕후는 1878년 5월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1863년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고종이 즉위한 후 대비라는 칭호를 받았다. 1866년에는 휘성(徽聖)이라는 존호를, 같은 해 여름에는 정원(正元)이라는 존호를 더 받았다. 1873년 수녕(粹寧)이라는 존호를 받았고, 1878년 철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대비가 된 왕비가 없으므로, 철인왕후는 조선의 마지막 대비로 기록된다.

무덤은 1878년 9월18일 이미 조성된 철종 예릉(睿陵) 왼편에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예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과 함께 현재 고양 서삼릉이라 칭하고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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