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10년 공들여 800여곡 작업, 77세 농부의 취미랍니다

입력 : 2020-09-09 00:00 수정 : 2020-09-0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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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슈베르트 가곡집 번역·출판한 김설지씨

교직 생활 접고 강원 화천에 정착…농사 매진

클래식 관심 커 동호회 활동 독일어·영어 대본 해석 ‘척척’

2000년부터 오페라 대본 번역 온라인 공유…실력 인정받아
 


2005년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거장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될 당시 국내 오페라 애호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에선 거의 40년 만의 공연이라는 점도 관심을 끌었지만 공연의 질도 다방면에서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오페라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가사 내용의 전달이 중요한 성악곡인 오페라를 번역한 이가 음악 전공자가 아닌 아마추어, 즉 평범한 클래식 애호가라는 점이었다.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올려놓은 번역본을 보고 국립오페라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관객 제공용으로 제가 번역한 대본을 써도 되겠느냐고요. 덕분에 지인 10여명과 함께 공연도 보고 무대 뒤에서 배우들도 만났죠.”

김설지씨(77)의 말이다.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이 모이는 ‘고클래식’ 등의 사이트에서 ‘nungaji(눈가지)’로 널리 알려진 그다. 아이디(ID)는 자신의 이름인 설지, 즉 눈 덮인 가지에서 따왔단다. 그는 이 아이디로 유기농 농산물 직거래 사이트 ‘마이너스 건강 클럽’의 생산 및 판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33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명예퇴직하고 50대 중반에 지인이 사는 강원 화천으로 귀농했다. 이후 1만9834㎡(약 6000평)의 밭에 농사를 지었고, 강원도에서는 11번째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유기농 인증도 받았다. 무농약 애호박·토마토·흑청콩 등 여러 작목반에서 활동하던 중 2003년도엔 그가 출하한 애호박이 작목반 특상품 중 1등을 차지하기도 해 농부로서 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낮엔 클래식을 들으며 밭을 갈고 밤이면 인터넷으로 직거래 주문을 받으며 바쁘게 지내던 중 발견한 것이 ‘고클래식’과 지금은 사라진 ‘페라하’ 등의 클래식 음악 동호회 사이트였다.

“워낙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종종 찾아 들었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오페라 대본을 번역해서 올리는 걸 봤는데 나도 해보자 싶더라고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라는 오페레타(Operetta·오페라보다 소규모의 작품들)를 번역해 인터넷에 공유하기 시작한 때가 2000년.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하려니 여름엔 시간이 나질 않아 번역작업은 겨울에만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번역한 작품은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고전 오페라뿐만 아니라 현대 오페라까지 망라한다. 독일어를 제외한 언어는 영어번역본을 참고하고 언어 전공자에게 감수도 받아가며 번역했다.

최근에는 슈베르트의 가곡 600여곡을 포함해 종교음악·극부수음악 등 800여곡을 수록한 <슈베르트 가곡전집>을 번역 출판해 관심을 받았다. 2011년부터 시작한 긴 작업에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지난하다면 지난한 일이지만 본인은 “외국어를 공부하고 사용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최고였다”며 농사일 틈틈이 행복했다고 미소 지었다.

이번 출간작업에 아쉬운 점도 있단다. 수록곡 중 종교음악은 가사가 라틴어라 번역을 하지 못해 원문만 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보고 그에게 라틴어 번역을 제안해온 이가 있어 아쉬움도 곧 해결될 예정이라고. 농사지으며 작업하느라 바쁜 그이지만 한층 완성도 높인 슈베르트 가곡전집으로 젊은 천재가 남긴 성악곡의 진수를 우리에게 선보일 날이 머지않았다.

화천=이연경 기자 world@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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