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의 新무궁화고] 우리 민족의 터전, ‘무궁화 삼천리’

입력 : 2022-09-14 13:06 수정 : 2022-09-14 13:11

[김영만의 新무궁화고] (3) 우리 민족의 터전, ‘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관용구 가운데 하나로 ‘무궁화 삼천리강산’이 있다. 언제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표현일까. 실마리는 조선의 영ㆍ정조 시대를 포함한 18세기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후, 실학의 부상과 함께 국가의 중요성에 대한 각성과 현실을 향한 관심이 깊어져 가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역사ㆍ지리ㆍ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대두됐고 이즈음 작성된 문건 가운데 무궁화 관련 기록들도 나타난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국토 상징의 의미가 더해지는 무궁화

18세기 문헌에서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무궁화 관련 기록들의 경향이 발견된다. 문신 홍양호가 엮은 <흥왕조승>(1799)과 <이계집>(1843)에 수록된 <토우기(土宇基)>의 ‘박달나무 무궁화 삼천리(檀木槿花三千里)’ 표현이 한 예다. 우선 여기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무궁화 삼천리’다.

삼천리는 우리 강역을 가리키는 말로 무궁화가 피어나는 공간적 영역을 특정해, 건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태조 이성계가 어릴 때 독서하던 토담집 터에서 왕업을 일으키고 새 나라를 이룩했다는 예찬기인 <토우기>에 남겨진 ‘무궁화 삼천리’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터전, 즉 국토로 볼 수 있다.

무궁화가 국토의 상징으로 언급된 사례는 <토우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문신 신유한(申維翰)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기록집 <해유록>의 1719년 8월8일 문건에 남겨진 “무궁화 핀 청구를 가리키며 신라의 가을 빛 바라보네(指槿花於靑邱兮 睋始林之秋荒)”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신라 눌지왕의 동생을 일본에서 구출하고 현지에서 참형 당한 박제상(朴堤上)의 충혼을 기리는 시문의 일부다.

‘청구(靑邱)’는 삼국시대 이래 사용된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무궁화 핀 청구(槿花於靑邱)’는 ‘무궁화가 피어 있는 우리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망부석의 대상자이기도 한 박제상을 떠올리며 그를 애도하는 시문에 언급된 무궁화는 1300년 전에 신라 충신이 타국에서 죽음을 앞두고 그리워했을 가족ㆍ고향ㆍ조국(신라)이 있는 땅이었다.

그런가 하면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무궁화 강산에 천년 나라 세울 때(槿花亥立千年國)”라는 문구를 선보였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처음 세운 강토를 무궁화에 빗대어 언급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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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溪集) 제5권, 삭방풍요(朔方風謠), 토우기(土宇基) 출처=한국고전종합DB

무궁화에 대한 역사 인식

18세기 무궁화 관련 기록 가운데는 무궁화의 시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표현도 나타난다. 조선 후기 유박(1730∼1787)이 지은 원예전문지 <화암수록>에 인용된, 안사형의 “단군이 나라를 열 때 무궁화가 처음 나왔다(我東方檀君開國之時 木槿花始出)”와 “오직 무궁화만이 우리나라 옛날의 봄날을 누렸다(唯槿花領東土昔日之春者也)”라는 문장이 그렇다. 그가 생각한 무궁화란 우리 민족과 시작을 함께한 꽃인 셈이다.

<화암수록>에 수록된 위 기록은 앞서 살펴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문장과 더불어 무궁화가 우리 민족과 유구한 시간에 걸쳐 관계를 맺어온 것에 대한 당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조선 왕실의 기록

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의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무궁화가 총 5회 언급돼 있다. 그중 <정조 21년(1797) 7월 21일> 문건에서 ‘근역(槿域ㆍ무궁화 나라)’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784년 정조의 명에 따라 승문원에서 보관하던 외교문서 가운데 중국 및 일본 관련 교섭 문서들을 집대성한 외교문서집 <동문휘고>에는 무궁화 관련 기록이 1800년대까지 총 34건 나타난다. 이 중 32건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근역(槿域)ㆍ근향(槿鄕)ㆍ근화지향(槿花之鄕)ㆍ근방(槿邦) 등을 언급한 문건이다. 조선시대에 외국으로 보내던 나라문서(國書)에서 ‘무궁화 나라’로 자칭한 표현이 빈번하게 활용된 사례다.

조선 왕실 문헌에서 무궁화는 나라를 뜻하는 ‘근역(槿域)’의 의미로 기록됐다. 무궁화가 신라 ‘근화향(槿花鄕)’에 이어 조선의 국가 공식기록 가운데 활용되며 나라 상징으로서 위상을 확보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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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779책, 정조 21년(1797) 7월21일 출처=승정원일기

18세기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무궁화의 상징성

무궁화는 18세기에 접어들며 국토를 상징하는 매개가 되었다. 여기에는 무궁화의 유구한 내력, 즉 역사성이 전제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등장한 ‘무궁화 삼천리’는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 영토, 즉 국토를 개념화하고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인식이 드러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처럼 한민족의 국토와 결합돼 상징성을 획득한 무궁화가 어떻게 국가의 개념과 결합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소개하겠다.


 

김영만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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