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는 ‘문명’의 기초…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

입력 : 2021-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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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한지장이 대나무발을 이용해 한지를 뜨는 작업을 하고 있다. 괴산=김병진 기자

전통한지 맥 잇는 안치용 한지장

닥나무 손질부터 도침작업까지 전과정 수작업…보름가량 소요

산업화 이후 수요 급감했지만 직접 개발한 친환경 벽지 인기

 

“한지를 대체할 기록 저장 소재가 있을 것 같으세요?”

18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서 만난 충북 무형문화재 제17호 안치용 한지장(63)이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인간을 닮은 로봇도 만들어낸다는 4차산업혁명 시대, 한지가 메모리 반도체라도 될 리 없으니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이동식저장장치(USB)는 잃어버리기 십상이고, 서버는 해킹에 취약하죠. 스마트폰 속 사진도 메모리가 고장 나면 살리기 어렵잖아요. 한지의 수명이 3000∼4000년 된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에 주목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설명대로 한지의 가장 큰 장점은 내구성이다. 비밀은 주원료인 국내산 닥나무에 있다. 섬유 조직이 촘촘하고 질겨 한지로 갑옷을 만들면 예리한 화살촉도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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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가 개발한 친환경 쑥 한지 벽지.

안씨가 한지장이 된 것은 정해진 운명 같았다. 어린 시절 강원 원주, 충북 제천·괴산을 돌며 한지를 만들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오랫동안 보고 자랐다. 곁에서 잔심부름을 할 때마다 주어지는 아이스크림이며 사탕 때문에 늘 한지공장에서 놀았다. 스물세살이 되던 해 부친의 공장을 물려받으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고(故) 류행영 한지장(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을 사사하면서 가장 얇은 한지인 ‘옥춘지’를 제작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한지는 그야말로 ‘기다림의 종이’다. 한겨울에 수확한 닥나무 4t가량을 솥에 넣어 찌는 데만 8시간이 걸린다. 찐 닥나무의 껍질을 제거한 뒤 나무 속 백피를 삶고 표백하는 과정을 거친다. 가느다래진 닥나무 섬유를 닥풀·물과 일정 비율로 섞은 다음, 이 용액에서 한지를 뜨는 ‘물질’에 들어간다. 대나무발을 이용해 좌우로 앞뒤로 용액을 걸러내면 닥나무 섬유가 얽히고설키면서 한지가 된다. 마지막으로 뽑아낸 한지를 말린 뒤 한지의 표면을 두들겨 다듬는 도침작업을 거치면 약 보름 정도 걸리는 지난한 과정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특히 물질에서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빛을 발합니다. 직감으로 한지의 무게와 두께를 계산해 물질을 해야 하는데, 워낙 예민한 작업이라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장에 들어섭니다.”

그는 한지장의 업을 ‘배고픈 예술가’로 표현했다. 한때 스무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한지를 찾는 이가 많았다. 일손이 부족해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한지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쌓아둔 한지를 모두 도둑맞고, 설상가상 공장 보일러가 폭발하는 사고까지 겪으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안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친환경 건축 소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가 제작한 한지 벽지가 주목받고 있어서다. 또 최근 닥피 조각이 알알이 박힌 옛날 한지도 복원해냈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 딸아이가 조금씩 한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반가운 일이다.

“한지는 ‘문명’입니다. 종이가 있었기에 역사를 기록하고 공동체가 만들어졌으니까요. 한지·한복·한글과 같은 전통문화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같은 겁니다. 지금이라도 문명의 기초가 되는 것들에 다시 관심을 두고 지켜나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속성으로 세운 ‘현대 대한민국 사회’가 세운 속도만큼 빠르게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에요.”

괴산=이문수 기자 moons@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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