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해법을 찾다] “이번 안건은 월간식단입니다“ 가족 평화 유지법

입력 : 202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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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주씨(맨 왼쪽)가 집 앞마당에서 가족에 게 인간관계를 주제로 한 책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번 안건은 월간식단입니다“

좌승주씨 가족 평화 유지법

자녀와 갈등 겪으며 마음고생 중요 결정마다 ‘가족회의’ 개최

주 1회 ‘독서 토론’…의견 공유 대화 많아지고 이해 폭 넓어져

“각자 독립성 인정해주면서 보듬고 지지하는 시간 필요”

 

가족은 혈연으로 묶여 그 어떤 공동체보다 끈끈할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일상이 갈등의 연속이라 누군가는 가족을 향해 비수를 꽂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가족이 갈등을 겪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는 물리적·심리적으로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상대방을 함부로 재단하는 탓이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사는 좌승주(39)·강민희씨(38) 부부 역시 과거 자녀와 갈등을 겪으며 수없이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홉살인 아들과 일곱살인 딸이 커갈수록 기존 양육방식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전업주부인 강씨는 아이들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고, 의사인 좌씨는 바쁜 업무 탓에 가족의 갈등을 감지하고도 손쓸 겨를이 없었다. 당연히 부부 사이에도 냉기류가 흐를 때가 많아졌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려면 뭔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난해 8월 좌씨 부부가 꺼내든 묘수는 ‘가족회의 개최’였다.

“부모가 지시를 내리면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따라오던 과거 세대의 방식이 더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느꼈어요. 자녀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여기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였던 셈이죠.”

좌씨 가족은 나름대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열고 있다. 3월 개최한 ‘제5회 가족회의’는 강씨가 소집했다. 회의에는 식사 시간을 제때 지키고, 가족이 함께 식사 준비를 하자는 안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구성원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반영된 주간 또는 월간 식단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최종 합의문에는 ‘식사 전 남매가 식탁을 닦고 수저를 놓는다’ ‘정해진 식사 시간을 지킨다’ ‘구성원의 기호에 맞게 저녁 메뉴를 다변화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회의 내용은 좌씨가 꼼꼼히 적어 개인 블로그에 남기고 있다.

가족회의 개최는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에 불만을 제기하는 구성원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간 대화의 양적·질적 변화도 생겼다. 차분한 자세로 상대방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니 가족간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어떨 땐 회의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갈 정도로 많은 대화가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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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주·강민희씨 부부의 두 자녀가 집 앞마당에 서 뛰놀고 있다(위쪽). 두 자녀가 함께 만든 ‘우리 가족 갤러리’. 제주=김병진 기자

‘자녀의 삶에 부모의 개입은 최소화한다’는 대원칙도 생겨났다. 강씨는 “회의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린 나이지만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정할 충분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지금은 아이끼리 싸워도 억지로 화해시키거나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반목을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준다”고 귀띔했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독서토론 시간인 ‘우리 가족 책모임’ 역시 가족을 단단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이다. 2019년 8월부터 시작한 이 모임은 각자가 고른 책을 읽은 후 돌아가면서 후기를 공유하는 시간과, 좌씨가 강사가 돼 인문·과학·역사·철학 등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책을 쉽게 풀어주는 독서 강좌 시간으로 구성돼 있다.

좌씨는 “얼마 전 독서 강좌 주제가 다소 무거운 ‘죽음’이라서 걱정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담담하게 생각을 쏟아내 깜짝 놀랐다”며 “가족과 함께하는 현재의 중요성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좌씨의 착안으로 감행한 ‘독박 육아 프로젝트’는 이 가족만의 실험적인 시도이다. 가사의 수고로움을 모두가 느껴보자는 취지에서 1년에 한번 일주일간 전업주부인 엄마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 기간 세 식구는 집안일을 분담한다. 실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하기 전 2019년 10월 강씨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대만을 방문해 모처럼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가족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좌씨 부부는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을까.

“어색한 가족이 갑자기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면 더 어색해질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게 먼저예요. 우리처럼 가족회의를 열 수도 있고, 가족끼리 마음을 터놓는 일기를 쓸 수도 있을 거예요. 각자의 독립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서로 보듬고 지지해주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가족제도를 설계한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만들어 준 것이라 확신합니다.”

제주=이문수 기자 leemoonsoo@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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