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세월, 겨레의 간절한 염원 상징 ‘무궁화’

입력 : 2020-09-02 00:00 수정 : 2020-09-02 23:53

[광복 75주년 기념 3부작] 옛 문헌으로 살펴보는 무궁화 (하)시대정신 ‘독립’을 담다

경술국치 후 절명시 쓴 황현 조국을 ‘근화세계’로 표현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독립군 주요행사 때 무궁화노래 불러

민족·한반도·고향 등 의미 일제 알아채고 탄압과 핍박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매천 황현이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 전 써 내린 절명시. ‘무궁화 나라’를 의미하는 ‘근화세계’가 쓰여 있다.


무궁화는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나라를 상징하며, 생활공간 속에서 선조들의 삶의 일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기존의 역사성과 대표성에 특별한 의미가 한층 더해진 상징이 됐다. 통한의 세월 우리 민족 곁에서 강인하게 뿌리내렸던 무궁화 관련 일제강점기 기록들을 살펴본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매천 황현이 자결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 그는 피울음을 섞어 써 내린 절명시를 남겼다. 시에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조국이 ‘무궁화 나라(槿花世界·근화세계)’ 글귀로 새겨져 있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안창호는 연설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을 외쳤고(1925), 윤봉길은 투탄의거 이틀 전 유작시 ‘광복가(1932)’를 지어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의 독립을 염원했다. 남궁억은 일제 경찰조사(1933)에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국화(國花)임을 주창했고, 재판장(1934)에서는 무궁화를 재배해 전국에 보급한 일이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날로 극심해져가는 일제의 압제에서도 김좌진·안중근·한용운 등 수많은 선열은 겨레의 가슴에 무궁화를 심었다. 그들에게 무궁화는 민족·조국·한반도·독립이었다.

선각자들의 피와 눈물이 스민 무궁화는 국경 너머에서도 피어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단체는 기념식(1920)과 회의(1924)를 시작할 때, 순국선열을 추도(1923)할 때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 또 해외 독립군이 전장에서 불렀던 군가와 시가 속에도 무궁화가 등장한다. 확인된 58수의 노래에서 무궁화는 조국·한반도·고향 등을 상징했고, 그리운 어머니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제는 무궁화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3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대외비로 펴낸 <고등경찰용어사전>에는 ‘무궁화는 2000년 전 문헌에 나오는 조선의 대표적인 꽃으로서 (중략) 무궁화 강산 운운하는 것은 조선의 별칭으로 불온한 뜻이 들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가 무궁화에 가한 탄압과 핍박의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독립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정신이었다. 무궁화는 이 시대정신과 맞닿아 독립의 상징이 됐다. 일찍이 의친왕 외 32인 민족대표가 작성한 ‘선언서(1919)’에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꽃으로 기록된 바 있으며, 우호익은 옛 문헌 고찰을 통해 무궁화가 민족의 꽃임을 <무궁화고(1927)>에서 밝혔다. 그런가 하면 차상찬의 <호서잡감(湖西雜感·1924)>에서 ‘국화(國花)’로 언급된 무궁화는 이후 수많은 기록들에서 국화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무궁화에 내재된 역사성과 대표성에 당대의 시대정신이 더해지고 발현됐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변하는 시대정신이 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무궁화에 그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담을 것인가. 군가 ‘독립군의 분투(1923)’에서 ‘무궁화가 봄 만나 다시 필 때에 우리 즐거움 따라서 무궁하리라’던 선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이 시대에 거듭나길 기대한다. 무궁화는 피고 지고, 또 핀다.

김영만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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