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시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입력 : 2020-01-01 00:00 수정 : 2020-01-01 23:14

 

[당선 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이주송씨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이주송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왼쪽부터) 곽재구 시인, 박성우 시인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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