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 흔들리는 땅 - 고선자

입력 : 2020-01-01 00:00
일러스트=이철원

“이제껏 농사짓는 아비가 한시라도 편허게 보인 겨? 일머리두 모르는 맹탕들이 입만 살아서 하는 헛소린 겨.”

“시상에 쓸모없는 땅이 워딨어! 촌에선 땅 틀어쥐고 등짝에 뿔난 이가 제일인 겨.”
 


쏟아진 물도 담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

대청마루를 건너온 전화벨이 사랑채와 맞닿은 마당 끝까지 요란하게 날아와 고즈넉한 평온을 깨뜨렸다. 곧이어 구들장을 지고 사는 점촌댁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문풍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날 배창호 내외는 저녁상을 건드려보지도 않고 차디차게 식은 채 그대로 물렸다. 별안간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은 내막은 다음날에야 낱낱이 드러났다. 서울 사는 배영수에게 생긴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불과 이태 전에도 큰 교통사고의 합의금을 마련하느라 창호 내외의 애간장을 졸여놨었다. 그 바람에 과수원 땅을 벤저민에게 팔아넘겨야 했다. 수족을 잘라낸 듯한 상실감에 해묵은 과목이 제 몫을 못해 골치를 썩인다는 핑계를 둘러댔지만, 그도 부족해 옹기점 땅 일부를 집터로 팔아 급전을 마련해 올려보냈다. 이번에는 웬만한 목돈으로는 해결될 성싶지 않았다.

“집안에 온통 빨간딱지가 붙구 난리라는디 도와줘야지 어쩐대유. 해결 못허면 감옥 간다는디 우선 살리구 봐야지 애비를 거기 들어가게 헐 순 없잖유.”

“시방 뭘루 살리잔 겨! 깨진 독에 물 붓기지, 그놈이 일낼 적마다 땅 팔아댈 순 없잖여.”

보름 앞서 영수가 초췌한 얼굴로 느닷없이 찾아왔다가 창호의 불같은 호통을 뒤통수에 매달고 되밟아 갔었다. 창호 내외는 창피스러운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쉬쉬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를 맞댔으나 당장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이라야 일이천만원 남짓했다.

급기야 하루에도 몇차례씩 전화를 걸어 빚쟁이 독촉하듯 생떼를 쓰던 영수가 헐레벌떡 다시 내려왔다. 집달관이 종적을 감춘 채무자 대신 보증 선 영수의 살림살이에 압류딱지를 붙인 지 닷새 만이었다. 썰물 때 갯벌처럼 휑하던 집안에 밤 깊도록 창호의 성난 목소리가 울타리를 타고 넘었다. 영수가 사정하며 울부짖는 소리도 안개가 자욱이 내리깔린 새벽녘까지 고샅으로 퍼져나갔다. 부자의 팽팽한 설전은 방바닥을 구르며 통곡하던 점촌댁이 혼절하자 일시에 중단됐지만, 넘어야 할 큰 산은 여전히 그들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농부는 밭이랑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배창호는 농번기면 부족한 일손으로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이리저리 뜀질하느라 끼니때가 지나서야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뒷간 볼일조차 참을 수 있는 한 참아내다 해결하는 버릇은 머슴살이를 시작한 열다섯살 때부터 몸에 밴 생활이었다. 그는 일거리에 치일 때면 눈앞의 영수를 야단치듯 객쩍게 사방에 대고 애먼 욕이라도 퍼부어야 꼬인 심사가 풀렸다.

“썩을 놈. 내, 대꼬챙이 하나 꽂을 땅두 주는가 봐라. 절대 안 줄 겨. 암만!”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그러해도 정작 속을 뒤집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허리 펴 하늘 한번 쳐다볼 틈도 없이 흙강아지 꼴인 그를 향해 이웃들이 상머슴이 따로 없다고 던지는 비아냥 때문이었다. 불난 데 풀무질하듯 어릴 적부터 깐족대며 업신여기던 이웃 동갑내기조차 그의 속을 긁어놓았다.

“어이, 배가야. 우리 큰애가 이번에 은행장이 됐다네. 뭐니 뭐니 해도 자식농사가 제일이더라고. 그깟 빈껍데기 땅부자에 비하랴!”

그는 제 아들을 자랑삼아 내세우며 창호의 약점까지 들춰내서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럴 때면 못 들은 척하고 딴전 부리는 게 상책이었다. ‘너는 자식 보고 살아라, 난 땅만 보고 산다’며 목울대로 치받는 말을 삼켰다.

창호 내외는 셋째인 외아들 영수를 애지중지 키웠다. 두 누이와 달리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를 복숭아 과수원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논보리 타작 무렵이면 도지는 피부병이 복숭아가 흐드러질 철에는 온몸으로 번져 걸핏하면 병원까지 혼비백산 내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창호의 속앓이 가운데는 하나뿐인 아들이 애당초 농군으로 글렀다는 애석함도 들어 있었다.

영수가 제 앞가림할 수단으론 공부뿐이었으나 공부 머리조차 없어 대학교 입학시험에 번번이 실패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디밀고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서도 한두달 만에 퇴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창호는 그런 아들을 보며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고, 신뢰 또한 오래전에 거둬들였다. 그런 영수가 달포 넘게 제 부모를 졸라서 타낸 사업자금으로 서울 변두리에 엘피지 가스충전소를 차리고 가정을 꾸려 서울에 눌러앉았다. 창호는 마지못해 조건까지 내걸며 사업자금을 마련하고도 갈퀴 같은 손에 쥔 돈다발을 선뜻 넘겨주지 못했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단 서울서 사람 상대허기가 얼매나 고된 일인디…. 바지런히 헐 수 있으면 한번 혀봐. 허나, 쉰살이 되면 내려온단 약조를 문서루 남겨야 혀.”

“그때쯤엔 저도 실실 농사나 지으면서 편하게 전원생활을 즐길 생각이에요.”

“편허게 실실! 이제껏 농사짓는 아비가 한시라두 편허게 보인 겨? 일머리두 모르는 맹탕들이 입만 살아서 허는 헛소린 겨.”

“그러니 이젠 먹을 만큼만 짓고 쓸모없는 땅은 팔아 현금 쥐고 편하게 사세요.”

“시상에 쓸모없는 땅이 워딨어! 촌에선 땅 틀어쥐고 등짝에 뿔난 이가 제일인 겨.”

창호에게 땅은 목숨과 같았다. 목 뻣뻣이 세우고 거드름 피울 수 있는 배짱도 땅에서 비롯되었다. 이른 새벽 눈뜨자마자 들판으로 나가 한눈에 담지 못할 너른 땅덩이를 몇번씩 휘둘러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땅을 한시라도 눈에서 멀리 두면 불안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걸핏하면 뒷짐 진 채 멀쩡한 논두렁을 지근지근 밟아 다지곤 “삼밭내선 내 땅 밟지 않고 못 다닌다”는 혼잣말을 하며 배를 불쑥 내밀기 일쑤였다. 그리 으스대는 모양새에 익숙한 점촌댁조차 거기 있는 땅이 밤새 꺼지기라도 하냐며 목숨 놓칠 뻔했던 일까지 들먹여 지청구해도 귓등으로 넘겼다.

그는 지난해 겨울, 논바닥 물웅덩이를 메워 벼 한포기라도 더 심어 먹겠다며 밤늦도록 지게질하다 발을 헛디디고 언 땅에 나자빠져 겨우내 자리보전했었다. 그때 생긴 옆구리 흉터를 훈장처럼 여기며 쓸어모은 안마당 흙까지도 채전에 뿌릴 만큼 제 땅에 애착이 강했다.

부모 일찍 여의고 창호가 물려받은 건 오롯이 배씨 성 하나였다.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어 그 집 데릴사위가 되기 전까지 땅임자가 되는 건 잠결에 스친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처가 땅을 물려받았을망정 마침내 대지주의 꿈을 이룬 그는 온 세상을 가진 듯한 기쁨에 취해 살았다. 제 이름자 적힌 우편물조차 거꾸로 들고 헤매는 까막눈이지만, 배웠답시고 행세하는 이가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손에 땅 한 모서리도 넘기잖고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그를 옥좼다. 눈 돌리는 곳마다 널린 일거리에 파묻혀 흙투성이 몰골인 채 살아도 농사꾼은 땅 파다 거기 묻히는 거라며 땅에 대한 집착만은 놓지 않았다.

옹기 굽는 마을은 나무 타는 연기가 목화송이처럼 피어올랐다.

삼밭내 열여섯 가구는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두개의 옹기막과 열다섯 집이 있는 옹기점과, 한 집만 외딴섬처럼 뚝 떨어진 사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지금은 사기막 터조차 사라진 곳에 창호 내외가 외따로 살고 있었다. 사기점에서 나고 자란 창호의 처가 점촌댁으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했다.

칠순을 넘긴 베드로가 옹기점 유일의 옹기장이였다. 그가 옹기와 연을 맺은 때는 백오십여년 전이었다. 증조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전라도 어느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옹기를 만들기 시작하며 가업으로 이어졌다. 옹기점은 베드로가 가족을 이끌고 잡초 무성한 돌무지에 움막을 지어 살며 알음알음 소식을 접한 연고자들이 모여들어 옹기마을로 번창했다.

조상 대대로 삼밭내 토박이였던 창호의 장인은 버려두다시피 한 땅에 들어온 베드로에게 그때부터 토지세를 거둬들였다. 그가 가마를 지을 때도 땅 주인 허락을 받기 위해 애걸복걸 매달려 통사정했었다. 창호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제 속내를 손바닥 보듯 훤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아랑곳없이 베드로와 옹기점 사람들에게 적잖이 위세를 부렸다.

그들은 삼밭내에 정착해 날품팔이로 연명하다 농한기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가마를 짓고 옹기 제작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창호의 장인이 가마 짓는 일을 그토록 결사반대한 까닭도 농사일에 손 빌릴 일꾼이 줄어들 염려에서였다. 남자들은 성근 체에 흙을 치고 반죽해 떡메로 두들기는 일을 했다. 밟고 치댄 점토로 밑창타래미를 만들어 물레를 돌리면 베드로의 머릿속에만 들었던 온갖 옹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옹기가 완성되면 말리는 일은 여인들이 책임졌다. 외형을 갖춘 옹기를 가마에 넣는 날에는 어른, 애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이 총동원됐다. 옹기 빚는 기술 못잖게 가마에 재고 불 때는 일도 눈과 체온의 감각이 절대 중요한 과정이었다. 옹기를 꺼내는 날만큼은 흥청망청 남부럽지 않았다. 마을에 옹기 굽는 연기 대신 고기 굽는 연기로 자욱한 날이면 으레 술판부터 벌어져 배불리 먹고 마시며 포식하는 날이었다.

옹기점 여인들은 무싯날엔 옹기막 뒷일을 거들다 인근에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저마다 장돌림이 됐다. 제 몸집보다 큰 독을 인 채 양손에 항아리를 들고 오일장에 나서는 진풍경은 과히 볼만했다. 겉보기엔 커다란 독 하나를 인 듯해도 그 안에는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작은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손에 든 항아리에도 뚝배기나 간장종지 같은 작은 질그릇을 넣어 공간을 허투루 비워두지 않았다. 버스에 싣고 내려 흥정해 파는 일은 아녀자 몫이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듯 그녀들은 판로를 개척하며 옹기점을 원활히 돌아가도록 이끈 주역이었다.

그러나 처음 삼밭내에 정착해 한푼 벌이가 다급해 일거리 구하던 때를 옛 얘기 삼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테인리스와 값싼 플라스틱 그릇이 퍼지고 가정마다 냉장고가 필수품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핵가족시대로 변화하는 세상에 김치냉장고까지 나오자 옹기가마에 불붙이는 날이 뜸해지고 결국, 두개의 굴뚝에선 시나브로 연기가 사라졌다. 고심 끝에 사대째 이어온 가업을 접기로 마음 굳힌 베드로는 일꾼들에게 면이 서질 않았다. 수제자 한명 키우지 못한 허탈함은 둘째치고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그들 밥줄을 제 손으로 끊는 괴로움이 더 컸다. 베드로는 기계 제작으로 옹기를 대량 생산하는 김제의 공장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마을 사내들도 뿔뿔이 흩어져 돈벌이를 찾아나서며 옹기점은 졸지에 부녀자만 남은 생과부촌이 되었다. 옹기점 사내들이 옹기 일에 손을 떼고 떠났다는 얘기가 창호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그 일을 가장 반긴 사람은 점촌댁이었다.

“옹기점 아낙들을 밭일에라두 데려다 쓸 수 있으니 잘된 일이잖유.”

“그래 봐야 밭뙈기 풀 뽑는 일이지. 당신이 영수 구슬려 그만 내려오게 해볼 텨?”

“애비가 내려온들 먼 일을 허겄어유.”

“병든 쥔이 일꾼 열 몫은 허는 겨. 논밭 두렁에 섰기만 혀두 일이 빠를 거구먼.”

창호가 아들과의 약조를 문서로까지 남겼어도 글 모르는 처지에 허울 좋은 형식일 뿐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옹기점 사내들이 떠나고 젊은 여인들은 연무읍 내 식당이나 인근에 조성된 농공단지로 앞다퉈 스며들었다. 창호 내외가 내심 기대했던 일꾼은 나이 든 여자 네댓명뿐, 일손이 태부족하긴 매한가지였다. 점촌댁이 그나마 아녀자들에게 밭일을 부탁하러 옹기점을 찾아간 날이었다. 품팔이를 반기려니 믿었던 그들 대부분은 뜨악한 얼굴을 했고 더러는 서릿발 내린 듯 싸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마 굶어 죽어도 이젠 그 집 일은 아무도 안 갈걸요.”

말 섞어 입씨름 한번 해본 적 없는 점촌댁은 얼굴이 화끈거려 변명조차 변변히 할 수 없었다. 유난스럽게 옹기점 사람들 일에 참견하고 주인행세를 한 남편 처세를 훤히 알기 때문이었다. 말수 적은 아낙까지 새치름한 표정으로 흥정하듯 은근히 속내를 내비쳤다.

“일당을 얼마나 주시려고요? 요즘 늙으나 젊으나 누가 땡볕에 나앉아 농사일하려고 해요. 훈련병 입소날이면 네시간만 일해도 육만원 주는데.”

생각지도 못한 금액에 놀란 점촌댁이 흥정은커녕 혀를 내밀고 도리질하며 조붓한 오솔길을 털레털레 되밟아 돌아왔다. 소아마비로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상체가 그날따라 유달리 기우뚱거렸다. 일이 틀어져 맥없이 돌아온 그녀가 멋쩍어하며 창호 옆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몇이나 얻은 겨? 제대루 일헐 사람으루 고르긴 헌 겨?”

“지금 일꾼 골라가매 쓸 처진가유. 한사람두 우리 일은 안헌다네유.”

점촌댁이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볼품없이 말했다. 옹기점 여인들에게 애꿎은 화살받이가 된 채 입술 한번 달싹이지 못하고 돌아설 때부터 극성스러운 남편을 원망하던 차였다.

“전부 배가 불렀구먼. 언제부터 일을 가려 했다는 겨! 대체 이유가 뭔 겨?”

“뭐긴 뭐여유. 썩을 논산훈련소 앞 식당에서 품삯을 올려놔 그러지유.”

뱉은 겉말과 달리 마을 여인들이 쑥덕거리는 소릴 꼭지 뒤에 달고 올 때부터 목구멍을 치받던 속말,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 가래침 뱉듯 속 시원히 쏴붙이고 싶었다.

“어허, 당장 큰일이네. 낼은 읍내 인력사무소에라두 알아봐야겠구먼 그려.”

이따금 나간 읍내에서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다니는 외국 젊은이들을 보며 꽤 의아쩍고 낯설었다. 그들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몰려든 노동자란 걸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에게 농사일까지 맡기는 세상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 몸이 늙은 만큼 급변하는 세상을 절감한 그는 못내 마음이 씁쓸했다. 한풀 누그러진 남편 표정을 단박에 읽어낸 점촌댁이 기회다 싶었는지 속내를 털어냈다.

“마리아는 집안일이면 뭐든 헐 수 있다든디 당신은 어찌 생각허남유?”

그녀는 그 얘길 하려고 튀어나오려는 입바른 소리를 애써 참아 꾹꾹 눌러놨었다.

“당신이 불편헌 몸으루 쪼매 거시기 허긴 혔지. 그이두 품삯을 그리 달라는 겨?”

“아녀유! 말을 맞춰보든 안혔는디 달삯으루 허면 그보단 깎을 수 있잖컸어유?”

안살림 얘기로 남편 심기를 건드릴까 봐 조바심하던 그녀는 창호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멀쩡한 다리 하나가 생겨난 듯 뛸 듯이 기뻤다. 이내 손끝 야무진 마리아가 점촌댁 안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창호는 농사일을 등한시하며 편하고 깨끗한 일만 찾아 밖으로 나도는 옹기점 여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나 마리아는 달리 보았다.

쌍심지로 불을 밝혀도 가장 어두운 곳은 등잔 아래였다.

옹기점이 개미굴을 들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 배가 사발 엎어놓은 듯 나부죽이 솟을 때만 해도 남편 죽고 이유 없는 무릿매질에서 벗어나 살이 오르려니 했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양푼만큼 커진 배가 한가위 보름달처럼 부풀고서야 홑몸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옹기점 여인들은 마리아와 정 나눈 남자를 궁금해하며 걸핏하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때마다 솟은 배를 양손으로 떠받친 마리아가 내뱉는 건 한숨뿐이었다. 더러 그녀 행실을 나무라기보다 다독이는 아낙도 있었다.

“곧 잠잠해질 테니 부끄러워할 거 없어. 서방 놔두고 바람피운 것도 아닌데 뭘.”

하지만 그들조차 뒤돌아서면 마리아를 입도마에 올려 난도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혼인해 한해도 못 살고 세상 뜬 마리아 남편의 죽음까지 덧씌웠다. 벌써 십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녀 남편은 고주망태로 옹기막에 들어갔다가 무너지는 옹기 더미에 깔려 희뿌연 재를 뒤집어쓴 채 목숨을 잃었다. 옹기점 여인들은 사내들이 벌이를 위해 객지로 떠난 뒤 생과부로 사는 신세를 한탄했었다. 그러나 부재중인 제 남편이 마리아 일에 지목될 일 없어 모두 안심하는 눈치였다. 며칠이 지나 마리아가 집에서 순산했다는 소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을 곳곳으로 파다히 퍼져나갔다. 어림잡아 1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사기점까지도 삽시에 전해졌다. 징검다리 건너뛰듯 입에서 입을 타고 날아다닌 소문의 핵심은 아기 성별이나 산모의 건강상태가 아니었다.

“아이고, 영수 아부지. 큰일 터졌구먼유. 마리아가 깜둥이를 낳았대유.”

 

일러스트=이철원

점촌댁이 호들갑 떨며 내놓는 말에 창호의 미간이 잔뜩 쪼그라들며 내 천자를 그렸다. 그는 구겨진 종잇장처럼 표정이 일그러진 채 되묻지 못했다. 읍내와 뚝 떨어진 작은 마을에 피부색 다른 외국인을 들인 장본인으로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벌어진 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그의 근심이 자기가 소유한 땅덩이보다 크고 무겁게 내리눌렀다. 자신이 고용한 스리랑카인 노동자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애 아버지를 유추하던 창호가 내심 벤저민을 지목했다. 그는 우리말도 제법 알아들어 믿고 앞세워 일을 맡겨온 터라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벤저민 앞에서 샐샐 웃음을 흘리던 모습이 영 마땅찮았어도 늘 웃는 낯이라 예사로 넘긴 게 불찰이었음을 비로소 자각했다.

 

오지나 다름없는 삼밭내에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창호가 연무읍 내 인력사무소를 통해 데려온 스리랑카인 노동자들이었다.



오지나 다름없는 삼밭내에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창호가 연무읍 내 인력사무소를 통해 데려온 스리랑카인 노동자들이었다. 그들과의 언어소통이 원활치 않아도 창호가 손짓, 발짓해가며 시키는 일만큼은 곧잘 따라 해서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인력시장을 통한 외국인 노동자 고용은 일사천리로 이뤄졌고 창호도 한시름 놓게 되었다.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데리고 오는 연결고리까지 생겨 중간단계를 건너뛰는 편법까지 썼다.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본능이었다. 그들을 매번 일당으로 쓰기가 번거로운 창호가 더 큰 속셈을 품기 시작했다. 줄곧 별러온 그가 벤저민을 앉혀놓고 꿀 발린 가래떡처럼 겉만 달차근한 목소리로 내내 꾸며온 꿍꿍이셈을 슬쩍 드러냈다.

“벤저민아, 맨날 먼 데 드나들자니 힘들지? 아예 여기서 먹구 잠서 일허지 않을 텨? 방세두 안 나가구 얼매나 좋아.”

“음, 나 혼자 음, 안돼. 음, 친구 더 있어.”

창호의 말뜻을 알아들은 벤저민이 비록 어눌한 말로도 친구까지 데려올 반응을 보였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형국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헤벌쭉 벌린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한 너털웃음까지 터뜨렸다. 창호는 다른 입김 쐬기 전에 그날 밤 당장 제 집 사랑채로 벤저민 일행의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그들의 짐은 여차하면 언제라도 떠날 듯이 옷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해 떨어지면 무인도처럼 적막하던 외딴집이 벤저민 일행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시커먼 젊은 사내들이 나드는 집에 얼굴 뽀얀 마리아가 말없이 오가며 제 몫보다 많은 일을 자분자분 해치웠다.

벤저민 일행 덕분에 부족한 일손 타령이 한결 줄어든 창호는 생각지 못했던 근심이 적잖이 쌓여갔다. 외국인 일꾼들이 창호의 지시보다 벤저민 말을 더 따르기 때문이었다. 제 말보다 벤저민 손짓이나 눈짓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꼴을 보자니 뒤보고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한 창호의 속내가 더운 날 밀주처럼 부글부글 괴어올랐다. 끓는 화를 다스리지 못한 그가 끝내 언성 높여 나무라며 상한 감정을 드러냈다.

“야, 이놈 자슥들아! 어른 말이 안 들리는 겨? 어찌 냉큼 움직이덜 않구 구랭이마냥 꾸물거리는 겨!”

눈치 빠른 벤저민이 일행에게 제 나라말을 쏟아내자 둘은 연장을 챙겨 후다닥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벤저민이 그들을 따라 쏜살같이 나간 뒤에도 창호는 아침에 먹은 된밥이 얹힌 듯 명치의 묵직함이 영 풀리지 않았다. 저들끼리만 주고받는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니 더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왠지 무시당한 기분은 떨떠름한 땡감을 베어 문 듯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오전, 오후 삼십분씩 퍼질러 앉아 쉬는 그들 꼬락서니를 모른 체하기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 벤저민은 한술 더 떠 창호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선데이 음, 일요일에 쉬어. 음, 우리 힘들어. 휴식 필요해. 아니면 일 안해.”

“웬 갈 뻐꾹새 겉은 소리여! 그러니께 시방, 공일엔 놀겄단 겨? 허어, 농사꾼이 공일이 워딨어! 오뉴월 하루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 겨. 알어듣겄어?”

일요일은 쉬겠다고 잘라 말하며 지키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완강히 뻗대는 벤저민의 고집은 쇠심줄처럼 질겼다. 창호는 그들 요구를 들어주되 치솟는 기세를 꺾으려면 티끌만 한 트집이라도 잡아 혼쭐내야 할 성싶어 괜한 욕설로 으름장을 놓았다.

“너 이눔 새키! 어른헌테 반말허믄 못 쓰는 겨. 버릇없이 워디서 배운 말본새여?”

답답해 울화통이 터질 때면 잡히는 대로 매질하며 겨우 가르친 존댓말로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에도 그마저 가버리면 어쩌나 싶은 불안에 무조건 비위를 맞춰주었다. 일요일을 쉬기로 정한 벤저민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득달같이 읍내로 향해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급기야 토요일 오후에 나가 외박하는 일도 잦았다. 창호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안달하다 숙소에 나뒹구는 옷가지를 제 눈으로 확인해야 조바심 친 가슴을 비질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오간 데 없구, 딴 나라 일꾼 아니면 땅덩일 묵힐 판에”

“땅 지키기가 이라구 힘든 건 하늘이나 알까”



벤저민이 야금야금 내거는 조건을 한가지씩 들어주며 불안한 심경으로 해를 넘겼다. 설 쇠고 정월대보름 오곡밥도 식지 않아서부터 쌓이는 농사일을 보며 매일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해하던 창호가 최대 고비를 맞았다. 벤저민 일행이 일거리를 널브러뜨린 채 도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셋이 해내기엔 일이 많으니 인부를 더 고용하라는 반기였다. 계절의 시계는 봄날을 가리키는데 헤쳐갈 길은 덩거친 가시덤불이었다. 창호가 어이없어 벌린 입에 재갈 물리듯 벤저민은 해법까지 제시했다.

“스리랑카 친구 많아요. 음, 많이 데려올 수 있어요.”

느리긴 해도 또박또박 조리 있게 말하는 그의 당돌함이 얼결에 창호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그려, 몇이 더 필요헌 겨? 그만큼 데려올 수 있긴 헌 겨?”

“다섯 있어요. 음, 집 없어요. 방 필요해요.”

기막혔다. 청산유수와 같은 말로 한 점 손해 보지 않겠다는 벤저민 셈법이 절로 고개를 내젓게 했다. 하지만 창호도 마냥 어리숙하게 당하지 않고 겨우내 골머리 썩이며 궁리한 끝에 찾아낸 묘수를 내놓기로 작정했다.

“그람 인자부터 니들 돈은 가을걷이 끝나면 한목에 받는 겨.”

그들을 주저앉히려는 속셈에 반신반의하며 던진 말인데 벤저민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곧바로 벤저민이 말한 제 나라 젊은이 다섯이 농사일에 합류했다. 삼밭내가 졸지에 스리랑카인들로 북적였다.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을 더 타기 마련이었다. 선산 지키는 소나무처럼 허리 굽고 손마디 굵어지도록 일꾼 부리는 수단은 이력이 났다고 자신했던 창호도 외국인 노동자 여덟명을 다루자니 힘에 부쳤다. 고용주와 근로자의 갑을관계만으로 무조건 밀어붙여 통제하기 버거운 그들은 차돌같이 단단히 뭉친 막강한 기세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일을 거론하며 어기댔다. 논과 밭, 과수원 일을 분담해 맡기라는 조건이었다.

정해진 일만 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은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자잘한 일까지 휘뚜루마뚜루 시키려던 창호는 틀어진 계획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와 벤저민의 밀고 당기는 기싸움은 합당한 권리를 내세운 일꾼의 완승으로 매듭지어졌다. 벤저민은 “욕하지 말아요. 우리 다 알아요. 때리면 안돼요. 그거 나빠요”라며 창호의 잘못된 언행 습관조차 따지고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신 않겠다는 약조까지 받아냈다. 창호는 눈앞의 상황에 피를 토하듯 탄식했다.

“아이구, 조상님네여. 인제 나라가 망허려는 갑네유.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오간 데 없구, 딴 나라 일꾼 아니면 땅덩일 묵힐 판에 그것들 눈치꺼정 봐야 허니 이를 어쩐대유. 땅 지키기가 이라구 힘든 건 하늘이나 알까 나라님두 모를 거구먼유.”

일곱해를 넘기자 삼밭내는 벤저민 일행이 차지해 마치 작은 스리랑카인 마을처럼 바뀌었다.

마을을 온통 흉흉한 소문으로 술렁이게 하고 태어난 아기가 어느새 새참 나르는 제 어미 뒤에서 술 주전자를 들고 따라갈 만큼 자랐다. 아이의 곱슬머리와 까만 피부, 짙게 쌍꺼풀진 커다란 눈매가 겉보기엔 영락없이 외국인이었다. 벤저민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살짜리 사내아이였다.

벤저민은 스리랑카에 있는 두 남동생까지 초청해 제 곁에 두었다. 마리아가 새로운 유형의 다문화가정을 이룬 것만큼 삼밭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부부는 한해 전 멀리서도 눈에 띄는 새집을 옹기점에 짓고 남부럽잖게 살고 있었다. 은행에 뭉칫돈을 넣어둔 알부자란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삼밭내에 스리랑카인 노동자 머릿수도 늘었다. 몇번의 들락거림에 낯선 얼굴이 보였으나 벤저민은 여전히 그들의 대변자로 일머리를 좌지우지했다. 삼밭내는 혈육까지 가세한 벤저민의 왕국 같았다.

사람도 땅도 앉은 자리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쪽같이 꼬장꼬장한 창호도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제 목을 단두대에 거는 심정으로 인근 마을 이장에게 땅 살 사람을 톺아봐달라며 신신당부하고 나섰다. 하루가 급한 창호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감감무소식인 그를 되찾아갔다 헛걸음하며 속이 새카맣게 타들었다. 그는 도리 없이 연무읍 내 부동산중개업소에 모든 전답을 급매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땅은 날개 없는 봉황 같았다. 땅 보러 오는 이는 감나무에 남긴 까치밥보다 드물었고 설령 온다 해도 살 엄두를 못 냈다. 꼭 한번 임자가 나섰지만, 그땐 창호가 당차게 거절해버렸다.

“이런 골짜기 땅은 헐값이에요. 이억오천이면 후하게 친 가격이니 제게 넘기세요.”

“뭣이여! 골짜기 땅? 내 땅은 삼년 가뭄에두 끄떡없이 나락 심어 먹은 알짜배기 논이여. 워디 허접한 천둥지기를 빗대 도매금에 넘기려 드는 겨.”

“그럼 얼마나 받으시려고요?”

창호는 아들에게 필요한 돈이 삼억이란 말을 목구멍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대신 못해도 사억은 줘야 한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무릇, 흥정은 비싸게 불러야 깎아도 손해가 없고 깎는 맛이 있어야 달려들어 덥석 문다는 계산에서였다. 창호의 꼼수를 눈치챈 상대는 되치기하듯 삼억도 많다고 먼저 응수했다. 그는 “집터 포함입니다. 이 집이 옥의 티라니까요”라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그 말이 원인이었다. 사람 사는 집까지 내놓으란 말을 영수가 당한 처지와 다름없이 여긴 창호의 부아를 건드려 거래는 무산되었다.

 

며칠 뒤 벤저민이 땅을 사겠다며 당당히 나섰다.

자괴감이었다. 그에게 땅을 팔면 뒤집힌 세상에서 뿌리까지 뽑힌 채 살아갈 날이 암담했다.



궁지에 몰린 창호가 부동산 사무실을 재차 다녀오고부터 노환으로 누운 점촌댁 보는 눈길에서 측은지심조차 사라졌다. 땅이 쉽사리 팔리지 않자 농약을 먹든 목매달든 해 죽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 영수의 발광이 있던 날이었다. 보다 못한 점촌댁이 오래 숨겨온 비밀을 폭로하며 집안 분위기가 일순간 괴괴해졌다.

“땅 쥔은 나여유, 내 땅, 내가 팔어 영수부터 살릴 테니 당신은 그리 알어유.”

창호는 단호한 점촌댁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머슴살이하는 집 외동딸은 절름발이로 혼기를 넘긴 처지였다. 그녀와 결혼하면 그 집 땅이 전부 제 것이 되는 줄로 알았다. 하여 평생 몸 사리잖고 논밭을 굴렀건만 진실은 달랐다. 그 사실을 확인시키듯 삼밭내 모든 땅이 점촌댁 명의라는 부동산 중개업자 말에 그는 절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땅이 갈라져 내려앉는 아득함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한 땅울림을 느꼈다. 지축을 뒤흔든 이명 뒤로 평생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초라한 제 몰골이 눈앞으로 또렷이 다가들었다.

며칠 뒤 벤저민이 땅을 사겠다며 당당히 나섰다. 영수가 필요한 삼억원에 이천만원을 더 얹어주고 집터도 빼주겠다고 했다. 창호는 마른침을 삼킬 만큼 구미가 당겼지만, 선뜻 응할 수 없었다. 자괴감이었다. 그에게 땅을 팔면 뒤집힌 세상에서 뿌리까지 뽑힌 채 살아갈 날이 암담했다. 하루가 지나고 여태껏 제 명의라 믿었던 땅에 기어이 벤저민의 팻말이 꽂혔다.

 

[당선 소감] 스승의 냉혹한 가르침 따라 초심의 자세로 써나갈 것
 

고선자씨


시작(詩作)에 입문한 뒤 사설로 풀어낼 사연이 많아 무모하게 소설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엮어놓는다고 해서 다 소설은 아님을 알았고, 그 극복의 길이 지난함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다양해서 그 깊이를 다 들여다볼 만큼 밝은 눈을 갖지 못해 숱한 착시현상에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심도를 가늠할 수 없을 때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기뻤습니다. 그것이 내 문학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고 나를 산문의 세계로 밀어넣는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목적한 길을 열어주신 농민신문사에 감사드리며 헐겁고 미흡한 작품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 거둬주신 심사위원 임철우·김종광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써서 그 수고에 답하라는 격려로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제 당선 소식을 전해듣고도 이제 첫걸음이라 여기시는 소설가 산정 김익하 선생님의 냉혹한 가르침에 따라 초심의 자세로 임할 작정입니다. 끝으로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내주신 서울 구로구 ‘문학의 집’ 동료와 성원을 보내준 내 가족과 이웃들에 늦게나마 고마움을 전합니다.

고선자 ▲1964년 경기 김포 출생 ▲2013년 월간 <문예사조> 시 등단

 

[심사평] 20~21세기 농촌 함축 의욕 근래 드문 해학적 문체 돋보여

(왼쪽부터) 임철우 소설가, 김종광 소설가

 

본심에 열두편이 올라왔다. 판타지가 한편도 없다는 것이 이채로웠고, 이야기가 없거나 부족한 생각소설 혹은 감정소설이 다수였다. 모자라거나 평이하여 예심을 못 통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농촌을 담은 소설이 두편에 불과했다. 농가인구 5% 이하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농촌소설도 그만큼밖에 생산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을 우선하기로 했다.

‘내 안의 직박구리’는 재미있었지만 농담처럼 가벼웠다. 흔히 말하는 깊이와 성찰이 강화되어야 한다. ‘부유하는 흰수염고래’는 아기자기했지만 몹시 낯익었다. 일반적인 경향을 넘어서는 새로움이 필요하다. ‘자염’은 인간문화재급 자염농부의 인생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전반은 수기공모전이었다면 당선작이 되고도 남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후반은 꾸며보려고 했으나 작위적으로 흘러간 느낌이다. ‘뭔가 더 대단한’은 단단한 문장으로 회사원의 하루를 정밀하게 관찰한다. 이른바 고현학적 글쓰기의 표본이다. 어머니의 실종, 자녀의 문제 등 뻔한 설정이 아쉬웠다. ‘대단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땅’은 장편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두어 소설을 하나로 급하게 합한 듯, 조화롭지 못한 구성이 아쉬웠다. 하지만 20~21세기 농촌사를 함축하려는 의욕, 근래에 드문 해학적인 문체, 당대 시골을 예리하게 담아낸 풍자정신 등이 돋보였다. 농경사회의 현재와 마지막을 기록해줄 사관을 만난 느낌이다. 아쉬운 점 때문에 더 훈련하기를 바라기보다는 당선작으로 뽑아 격려하기로 했다. 보배로운 작품을 다수 써줄 것이라고 믿는다.

진부한 말대로 소설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 여러분을 찾아온 그 이야기를 버리지 않고 퇴고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라는 응원을 낙선자들께 전한다.

사진=김도웅 기자 pachino8@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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