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영농·생활수기 당선작-일반부문] 새벽 공기를 맞으며

입력 : 2019-08-15 00:00
경북 구미로 귀농한 김지영(59·왼쪽)·김규환씨(65) 부부는 한우 200마리를 키우며 새로운 삶을 일구고 있다.

김지영 (59ㆍ경북 구미시 도개면)

한우 키우고 싶다는 남편 따라 귀농 보조나 잘하자는 마음으로 시작

처음엔 빨리 수익 내려고 육우 키워 출하시기 되자 소값 바닥 쳐 좌절

힘들다는 비명 절로 나올 시기 마을사람들, 위로의 손 내밀어

덕분에 힘내고 무엇이든 적극 참여 파종·밭갈이·용접 등 기꺼이 도와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 속 한우 암송아지 구입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한 데다 ‘마블링 건강에 나쁘다’ 오해 퍼져

한우 우수성 홍보했지만 역부족

농부 되고 나서 FTA 영향 절감 스스로 애쓴다고 변화되는 것 없어

농민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국가적 보호정책 필요성 깨달아

밟을수록 강해지는 ‘수크령’처럼 남편은 질 좋은 한우 생산 매일 고심

사료배합·혈통관리·기록관리 등 농장일 손수 해결…공부도 열심

단순 농작업부터 성우 출하현장까지 함께 다니며 제 역할 톡톡히 해내

요양원 봉사활동…부녀회 총무직 맡아 남 아닌 마을사람 일원으로 자리매김

아버지 영향…아들은 축산학 박사

FTA·구제역·장기불황 모두 겪어봐 다시 시련 닥쳐도 얼마든지 이겨낼 것



새벽에 일하러 나갈 때 피부에 와닿는 말끔한 공기의 촉감과 향은 언제나 새롭고 행복한 느낌으로 안겨든다. 노동으로 굳은 뼈마디, 세포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힘으로 일을 거뜬하게 해치우게 한다. 옮겨 심은 나무처럼 시들거리다가도 새벽 공기로 치유받아 다시 일어나게 된다. 만약 귀농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나 있었을까.

햇수로 10년차다. 우리 가족은 경기 소도시의 아파트생활을 청산하고 경북 구미 농촌으로 이사했다. 당시 남편은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고 한우농장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나는 농촌이나 한우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남편이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소망이고, 지금 나이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어서 보조나 잘하겠다는 어정쩡한 맘으로 따라왔다. 아들과 딸이 똑같이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겨울방학이었다. 각기 학교 주변에 원룸을 얻어 생활하게 했다. 그렇게 시작한 농촌생활이 올해로 10년이다. 영농·생활수기를 이제 쓴다는 것이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지금에서야 농촌에 진짜 뿌리를 내린 느낌이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이요, 내 마을이다.  

귀농 3년차에 귀농·귀촌 희망자를 대상으로 경북도에서 주최한 ‘귀농·귀촌 포럼 및 사업설명회’에 성공한 귀농인 자격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 귀농·귀촌 성공사례에 대해 외형이나 금전적인 성공만을 말했다. 발표자들은 귀농 3년차에 품목만 다를 뿐 거의 억대농군이 돼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귀농 3년차는 그동안 살아온 도시의 삶을 버리고 농촌에 새롭게 정착하느라 고단하기만 할 때였다. 한우 일관사육을 하고 있어서 최소 3년까지는 투자만 할 뿐 수입 자체가 전무했다. 게다가 그동안 벌어놓은 자금까지 바닥을 보일 즈음이었다. 아무리 사력을 다해도 현실은 깜깜했고 실낱 같은 희망만 붙들고 있을 때였다. 적어도 7~8년은 돼야 암소개량 3대째가 되고 뭔가 보여주거나 말할 것이 있을 텐데 성공한 귀농인이라고 하기엔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농업과의 인연은 땅에서 시작됐다. 야산 아래 자리한 우리 농장은 천수답으로 어렵게 농사를 짓던 땅이다. 원래 마을사람 3명의 소유였다. 정남향에 계단식 우사가 가능한 데다 땅의 날개 격인 양쪽 가에는 작은 개울이 자리하고, 앞이 트인 나팔모양의 구릉지여서 농장 위치로는 최적의 조건이다. 눈을 들어 멀리 오른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가다보면 맑은 날엔 금오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 땅을 선택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막힘없는 그 경치를 보고 있으면 눈이 시원해지고 막혔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우사가 완공되자마자 육우(젖소 수송아지)를 샀다. 낙농 관련 일을 할 때 알고 지내던 소장수의 거간으로 많은 송아지를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자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투자해서 단기간에 수익을 내고 한우를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하시기가 되자 소값은 곤두박질쳤다. 울며 겨자 먹기로 버리다시피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사료값으로 어지간한 아파트 두채값이 날아갔다. 젖소는 많이 먹고 뼈만 크고 똥만 쌌다. 우린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이들 학비를 댈 수 없을까 봐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직장을 잡아 이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힘들다는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고민해봤자, 책만 주야장천 읽어봤자 해결책은 없었다. 우리는 떠날 수도, 손을 놓고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자연에선 강한 생명만 살아남겠지만 사람은 서로 돕는다. 마을사람들은 괴롭고 막막한 우리를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었다. 제삿밥을 얻어먹으러 가고, 같이 천렵해서 끓여 먹고. 별거 아닌 일인 것 같은데 먹으면서 정이 나고 힘도 났다. 그러면서 종자를 나누고 힘들여 농사지은 농작물까지 서로 주고받았다. 차츰 마을일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우리가 가진 트랙터를 비롯한 대형 농기계로 이웃의 밭을 갈아주기도 하고 파종도 했다. 손수 우사를 지은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창고를 짓고 고치거나 용접을 하는 전문적인 일까지 부탁해오곤 했다. 남편은 기꺼이 그 일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젖소 수송아지를 키워 판매한 돈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어이없는 금액이었지만 그냥 흐트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금에 맞게 우시장에서 7개월 된 한우 암송아지를 사기 시작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조차 말렸고 한우산업은 여전히 바닥이었으나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송아지를 키워 송아지를 낳고, 그 송아지가 자라 송아지를 낳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가 귀농한 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수입 재개결정이 내려진 다음해였다. 대기물량이 싼값에 물밀듯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길목 좋은 가게마다 외국산 고기를 팔며 대형 현수막까지 걸어놓고 소비자를 유혹했다. 사람들은 경기 탓을 하며 한우를 외면했다. 방송에선 한우 마블링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댔다. 생산자로선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한우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우수한 유전자와 품질을 가졌다는 건 이미 입증된 바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우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들은 지식도 총동원했다. 한우 1++A 등급에 가까울수록 지방함유량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쇠고기 섭취량이 원체 낮아 문제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게다가 한우는 쇠고기를 구성하는 지방산성분 중 올레산 조성비율(약 50%)이 상당히 높다. 입이 아프게 말을 해봐도 모두 거두절미한 채 기름이 몸에 안 좋다고 싸잡아 매도했다. 그런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귀농인으로 살아보니 농업은 국내외 정세에 민감했다. 그 흐름을 예민하게 읽고 빠르게 대처한다 해도 농산물은 공산품처럼 단기간에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방패막이가 필요한 산업이다. 농업선진국들이 충분한 보조금을 지급해 농업경쟁력을 강화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식량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알아야 농업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농부가 되기 전엔 유럽연합(EU)·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농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모두 알다시피 FTA 체결로 자동차나 전기·전자 분야가 이득을 보는 대신 농업을 내줬다. 몸소 느꼈다. 미국발 광우병 공포가 국내 쇠고기 소비를 위축시키고 높은 석유가격은 곡물값을 상승시켰다. 세계 곡물값은 우리 축산업에 직격탄을 던졌다. 항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보따리상들은 무관세로 너무 쉽게 중국 농산물을 유통시켰다.

농민이 그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는 풍토나 국가 차원의 보호정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귀농 10년 동안 깨달았다. 우리는 지난 세월 성실하게 지킬 것을 지켜가며 농사지었다. 간절히 선진농업인이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애쓴다고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FTA 따위와 상관없이 남편은 누구 못지않은 열정과 자신감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자신을 밟을수록 강해지는 수크령이라 칭하며 한우를 어떻게 먹여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매일 고심했다. 옥수수·수단그라스·호밀·이탈리안라이그라스 등을 심고 친환경완전혼합발효사료(TMF)베이스를 사서 직접 사료배합을 했다.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해썹·HACCP)과 친환경인증을 받은 농가로서 시간 맞춰 사료와 풀을 공급하고 철저한 기록관리·혈통관리를 하며 사랑으로 키웠다. 게다가 시설과 기계 관리, 백신과 병 치료, 암소의 임신과 분만, 자금계획과 관리실행 등 농장의 모든 것을 손수 해결했다. 지금도 소 얘기가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모든 정신이 그쪽으로 쏠려 있다. 그의 근성과 열정은 지금도 능력 좋은 소를 만들어내고 있다.

남편이 하는 일들을 뭉뚱그려 말하고 보니 소를 키우는 일이 쉬워 보인다. 사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많은 공부를 하고,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아들과 토의를 거치면서 만든 결과물들이다. 생물은 예민해서 어느 한군데만 허술해도 금방 표시가 난다. 양수기가 고장 나서 고치고 있는데 우사 파이프가 떨어져 소가 튀어나오고, 한쪽에선 송아지가 태어나거나 아프고. 발정 난 암소에게 근친과 생산 형질 유전능력을 따져 수정을 시켜야 한다. 밭에 심어놓은 사료용 옥수수를 걷어 사일리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밭이 마를 새 없이 비가 온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

100마리 이상의 소를 키우다보면 일상의 일들, 이를테면 한마리 한마리 개별관리 기록을 하고 소에게 사료를 주면서 거름을 내고 발정이나 소 상태를 체크하는 일만 해도 되는 평화로운 날은 별로 없다. ‘내일은 뭘 할까?’ ‘10일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와 같이 늘 계획을 세우고 기록하고 확인해도 빼먹을 때가 있을 만큼 손을 써야 하는 일의 가짓수가 많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가진 끈기는 소를 키우는 한 10년뿐 아니라 20년이 가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 안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고 일을 즐겨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대로 농장 보조라도 하겠다고 나섰지만 처음엔 농장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열심히 남편을 따라다니며 단순한 일부터 반복해서 했다. 볏짚을 거두어들일 논에도, 옥수수나 수단그라스를 심어놓은 밭에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트럭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성우 출하현장에도 다녔다. 따라다니는 것에 이골이 날 즈음에야 비로소 ‘이런 일들을 어떻게 혼자 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일머리가 보였다. 어느 보조보다 낫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피곤한 줄 모르고 신이 나서 보조 역할을 수행했다. 짬짬이 시간을 내 요양원에서 봉사를 하고, 지금은 마을부녀회 총무를 맡은 지 7년차다. 사람들은 우리를 귀농인이 아닌, 언젠가 떠날 자가 아닌, 마을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였다. 딱 집어 언제부터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미 한데 섞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몇년 전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초·중등학생이 여럿 있었다. 지하철을 못 타본 아이들을 위해 대중교통으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고, 계곡 물놀이도 다녔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연극놀이에도 끼워주면 열심히 했다. 한 가정의 아들딸이 아니라 마을의 자식이었다. 그들은 이젠 다 자라 마을을 떠났다. 마을에는 더이상 어린아이들이 없다.

그러는 새 자식들은 훌쩍 자라 아들은 미국에서 축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그가 연구한 논문이 중요학술지에 종종 발표되는 것을 보면 꽤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은 항상 얘기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현장전문가가 진짜 전문가를 키웠다고. 딸아이는 이탈리아에서 예술 석사학위를 받고 본인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 누구든 나중에 돌아와서 농장을 이어받아 대를 이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지금의 농장이 한우연구농장으로 활용된다면 최선을 다해 농장을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이 더욱 커질 텐데. 좋은 유전자를 개발해놓고 한세대로 끝내게 되면 많이 아쉬울 게다.

귀농한 지 10년이다. FTA·구제역·장기불황이 몇번이나 뒤통수를 때렸지만 이제 그 터널을 모두 지나왔다. 또다시 비슷한 터널이 우리 앞에 놓인다 해도 그동안 쌓은 노하우로 주름잡듯 건너뛸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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