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고통은 사진이 아니다,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입력 : 2019-08-12 00:00
피해자기념공간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한편엔 무수히 많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마주한 통한의 순간들

일제, 침략전쟁 목적으로 강제동원 조선 인구 30%인 783만여명 피해

참상 보여주는 유물 400여점 전시

인력 상당수 탄광 등서 노역 시달려 당시 열악했던 환경과 비인간적 처우

급여명세서·수기 등에 오롯이 남아

해방 70여년…피해 생존자 고통 여전
 


8·15 광복절을 앞두고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 드높다. 최근 잇따른 일본의 경제보복조치 배경에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던 일본 정부와 기업은 수십년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묵과해왔다. 그 묵묵부답의 세월은 오늘날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돼버렸다. 피해자는 있으나 책임지는 가해자는 없는 지난한 싸움. 일제 강제동원, 그 끝나지 않은 역사를 돌아본다.



언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얼마 전 일본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일하러 떠난 후로 꿈에서나 만나던 언니를 말이다. 일본인 선생님의 배려 섞인 한마디는 열네살 소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혈육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소녀의 조심스러운 걸음을 어둠의 섬으로 인도했다.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강재공업 도야마공장에 강제동원된 김정주씨의 지옥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직 공장과 기숙사만을 오가며 밤낮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일상은 소녀의 희망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잠시 화장실에라도 다녀올라치면 관리자로부터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발에 차인 허리와 얼얼한 볼을 부여잡고 화장실에 숨어 운 날을 셀 수 없다. 당시 밤마다 쏟아지던 폭격기 공습을 피하기 위해 늘 옷은 물론이요, 신까지 신고 잠자리에 들었다. 열네살 채 피지도 못한 소녀의 삶은 공포와 절망으로 쪼그라들었다.

일제 강제동원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부산에 건립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엔 김정주씨와 같은 피해자들의 사연이 가득 새겨져 있다.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지역 침략전쟁을 목적으로 강제동원한 군인·노무자·군무원 등이 이 역사관의 주인공이다. 역사관엔 피해자나 유족들이 기증한 강제동원 수기·사진·물품 등 400여점의 유물과 역사자료가 전시돼 있다. 전시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다보면 자연스레 아픈 역사의 발자취를 뒤따르게 된다.

기억의 터널 : 노무자·군인 등 일제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펼쳐진다.


“1938년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본격적인 인력수탈에 나서면서 국내외를 통틀어 연인원 783만여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마저도 일본 측이 통계자료를 폐기하거나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는 실정이죠.”

역사관 관계자의 설명에 따라 전시된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현황을 살펴보니, 1942년 조선 총인구수가 약 2636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국민의 30%가량이 강제동원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강제동원 인력 중에는 특히 노무자의 비중이 컸다. 노무자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러시아 사할린 등 일제의 식민지·점령지로 보내졌다. 그리곤 탄광·광산·군수공장·토건공사장 등 각종 작업장에서 고된 노동을 도맡았다. 당시 강제노역의 노동조건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열악한 작업·주거 환경과 식사, 노동재해, 과도한 폭력 등은 노무자들의 심신을 병들게 했다. 그 참상은 일본 홋카이도 탄광의 노무자였던 강삼술씨가 쓴 <북해도 고락가>라는 역사관 전시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북해도 고락가 : 일본 홋카이도 탄광의 노무자였던 강삼술씨가 강제 노역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


‘두때는 밥을 주고 한때는 죽을 주니 생떼 같은 장정들이 배가 고파 못 견디어 / (중략) / 이때쯤에 우리 집은 잠을 깊이 자건만은 / 여기 나의 이내 몸은 수만길 땅속에서 / 주야간을 모르고서 이와 같이 고생인고 / 남모르게 나는 눈물 억수 많이 울었다오.’

급여명세서 : 강제동원돼 일본 탄광에서 일했던 윤병열씨의 급여명세서. 임금보다 공제금이 더 많았다.


가혹한 노동에 비해 제대로 된 임금을 주지 않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임금은 주는데 밥값과 군사 저금 등을 떼면 남는 것이 없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많은데, 역사관 한편에 전시된 일본 탄광 노무자 윤병열씨의 급여명세서가 이를 반증한다. 1945년 3월 그의 총 임금은 31원60전, 그러나 공제금으로 37원2전을 떼 오히려 5원42전이 채무로 남았다. 충령탑기부금·공습공제기금 등 여러 공제항목이 눈에 띈다.

훗날 해방의 날이 온 뒤에도 중노동에 시달린 조선인들은 착취당한 임금과 강제로 예탁한 저금 등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채 귀환해야 했다. 그나마 피폐해진 몸이라도 안고 고향 땅을 밟으면 다행이었다. 일제는 패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귀환 책임을 회피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건 오롯이 조선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소형 어선을 타고 오다 태풍에 목숨을 잃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할린의 동포들은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해방 직후에도 현지에 억류돼 한동안 돌아올 수 없었다.

그 후로 70여년이 흘렀다. 누군가는 세월이 약이라 이르지만, 피해 생존자 중엔 역사관 앞까지 와서도 차마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떠올릴 때마다 마디마디가 아린 그들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부산=하지혜, 사진=김덕영 기자 hybrid@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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