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산책] 태조에겐 ‘내조의 여왕’…방원에겐 ‘보복의 대상’

입력 : 2019-06-12 00:00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18)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5)신덕왕후 강씨

고려 찬성사까지 지낸 강윤성의 딸 태조 둘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왕비

아들 ‘방석’ 세자 책봉에 성공 왕이 되는 건 못 보고 눈 감아

방원, 왕위 오른 후 처절한 보복 무덤 ‘정릉’ 도성 밖으로 옮기고 정자각 파괴…봉분도 깎아내

현종 시대 돼서야 명예회복 논의 능 복구…신주는 종묘 모셔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가 아닌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1396년)였다.

고려말 신흥 무인으로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성계는 함흥의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에 비해 신덕왕후는 권세 있는 집안의 자녀였다. 아버지인 곡산 강씨 강윤성은 원나라 간섭 시기에 고려에서 찬성사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함흥에 적처(嫡妻) 한씨를 두었으면서도 이성계가 강씨와 혼인을 했던 것은 처가의 든든한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두명 이상의 부인을 동시에 두는 것이 허용됐는데 시골에 둔 부인을 향처(鄕妻), 서울에 둔 부인을 경처(京妻)라 했다. 신덕왕후는 경처로서 고려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옆을 지키며, 조선 건국과정에서도 ‘내조의 여왕’으로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신덕왕후 강씨는 무엇보다 이성계의 자녀들이 혼사를 잘 치르도록 주도했다. 신의왕후 소생인 방원과 방간은 어려서부터 개경에서 공부를 하며 신덕왕후의 보살핌을 받았다. 두 형제 모두 강씨의 노력으로 개경의 명문 여흥 민씨 가문과 혼인을 했다. 강씨는 1392년 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방원을 꾸짖는 이성계의 노기를 가라앉히면서, “공은 항상 대장군을 자처하면서 어찌 놀랍고 두려워함이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까?”라고 방원을 변호하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1392년 8월7일 태조 이성계는 강씨를 왕비로 정하고, ‘현비(顯妃)’라 하여 건국 후 첫 왕비의 위상을 올려줬다.

조선 건국 후 가장 큰 현안은 58세로 고령인 태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 선정문제였다. 신덕왕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해 방원을 철저히 견제했다.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방번을 후계자로 내정했다. 하지만 방번이 고려 왕실의 사위라는 약점을 신하들이 지적하고 나서자 결국 타협책으로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의 소생이 조선 왕실의 첫 세자가 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대대로 자신의 후손이 대를 이어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396년 8월, 신덕왕후는 방석이 왕이 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의지는 방원에 의해 무참히 깨지게 된다.

계비의 죽음을 유난히 슬퍼한 태조는 경복궁에서도 잘 보이는 현재 덕수궁 근처에 무덤을 조성하고 정릉(貞陵)이라 했다. 신덕왕후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1398년 8월26일, 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방원은 세자 방석을 비롯해 방석의 후견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사망한 방우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맏형이 된 방과를 왕이 되게 했다. 조선의 두번째 왕위에 정종이 오른 것은 태종(방원)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1400년 정종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방원은 이미 사망한 신덕왕후에 대해 처절한 정치 보복을 했다. 140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도성 안에 있던 정릉을 현재 성북구 정릉으로 옮기게 한 후,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버렸다. 1410년 흙으로 만든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져내리자 정릉의 병풍석을 가져와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도록 했다. 조선 건국 후 첫 국모인 신덕왕후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지지도 않았다.

성리학 이념이 자리를 잡아가던 현종 시대 신덕왕후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릉도 복구해야 한다는 논의가 잇달아 일어났다. 현종은 송시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릉을 복구하고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게 했다. 1669년 9월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는 날 <현종실록>은 “천도(天道)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는 것이기에 300년 지나서야 겨우 행해졌습니다”라며 신덕왕후가 왕비의 지위를 회복한 감격을 기록하고 있다. 정릉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제사를 지내던 날에 소낙비가 정릉 일대에 쏟아지자 백성들은 이를 신덕왕후의 원혼을 씻어주는 비라고 했다. 원래 정릉이 있던 덕수궁 일대는 지금도 정동(貞洞)으로 불리면서 신덕왕후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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