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혼인 적령기 여인들은 ‘처녀단자’를 올리시오”

입력 : 2019-05-15 00:00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15)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간택 이야기

왕이나 왕세자 혼례 예정되면 금혼령 내리고 ‘지원서’ 받아 양친 생존·2~3세 연상 선호

내정된 경우 많고 비용부담 커 실제 응모자는 25~30명 불과

신부의 지혜 알아보는 면접 중시
 


조선시대 왕비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은 간택(揀擇)이다. 대개는 왕세자빈의 지위에 오르는 혼례식을 올렸고, 단종이나 고종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되면 정순왕후(定順王后)나 명성황후의 경우처럼 바로 왕비가 되기도 했다. 계비의 신분에서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와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계비에서 왕비가 된 사례다.

대부분 왕실 혼례에서는 세차례의 간택이 실시됐다.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가 예정되면, 조정에서는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혼인 적령기인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處女單子)’를 올리도록 했다. 처녀단자란 요즈음으로 보면 왕비 후보 지원서인 셈이다. 종실(宗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은 처녀단자를 올리지 않아도 됐다. 양친이 모두 생존해 있고, 왕이나 세자보다 2~3세 연상의 여성을 선호했다. 따라서 조선의 왕 중 상당수는 왕비보다 연하였다.

일국의 왕비 자리에 오르는 만큼 많은 처녀들이 지원서를 올렸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고작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신부가 내정됐는데도 형식상의 절차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간택에 참여할 경우 의복이나 가마를 갖춰야 하는 등 비용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딸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면 집안 전체가 정치적인 폭풍에 휘말릴 여지가 컸던 것도 간택을 꺼리는 이유가 됐다.

대개 초간택에서 6명, 재간택에서 3명, 그리고 최종 삼간택에서 왕비를 선발했다. 세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침으로써 왕비 간택에 최대한 공정성을 기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입었다. 초간택 때의 복장은 노랑 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이어 재간택과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도 조금씩 늘었다.

간택 때는 신부의 지혜를 알아보는 면접도 중시됐다. 정순왕후가 영조의 계비로 간택을 받을 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답하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이 가장 깊다”고 말했다. “물건의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 있지만 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어 제일 좋은 꽃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목화꽃”이라고 답했다. “다른 꽃들은 일시적으로 좋은 데 불과하지만 목면은 천하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다”고 답하면서 총명한 신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줘 마침내 계비로 간택을 받았다.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는 <한중록>에서 간택 때 부모들이 기울인 노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해에 왕세자의 간택으로 단자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부친(홍봉한)이 말씀하시기를, ‘내 세록지신(世祿之臣·나라로부터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이요, 딸이 재상의 손녀인데 어찌 감히 위를 속이리요’ 하고 단자를 올렸으나, 그때 우리 집이 극빈하여 새로 의상을 해 입을 수 없었으므로 치마감은 형의 혼수에 쓸 것으로 하고 옷 안은 낡은 천을 넣어 입히셨고 다른 차비는 선비(어머니)께서 빚을 얻어 차리시느라고 애쓰시던 일이 눈에 선하다.”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초간택 때 왕실 어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영조대왕께서 미천한 나의 재질을 칭찬하시며 각별히 어여삐 여기시고 또 정성왕후(영조의 비)께서 나를 착실하게 보시고 선희궁(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께서는 내가 간택하는 장소에 나아가기 전에 미리 보시고 화기가 얼굴에 가득하여 사랑하시오니 좌우에 궁인들이 다투어 앉았으므로 내 마음과 몸가짐이 매우 힘들었다”는 기록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엿볼 수가 있다. 또 “간택 이후 갑자기 찾아오는 친척들이 많고 전에 인연을 끊었던 하인들도 오는 이가 많아졌으니 인정과 세태를 가히 볼지라”라는 기록에서는 권력층에 접근하려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간택을 통과해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른 조선의 왕비. 그러나 그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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