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밑줄 긋기] 땅, 소유냐 존재냐

입력 : 2020-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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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땅이었으면 좋겠다 김형표/글상걸상 312쪽/1만5000원

농부는 씨 뿌리기 전 흙을 만들고

흙 속을 ‘생의 깊이’로 가득 채워

 

갈무리가 끝난 밭고랑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온다. 뭍의 농사가 잠시 숨을 고를 이즈음 월동작물을 키우는 제주 농부들은 여전히 바쁘다. 스스로 일군 밭에 뿌리 내린 당근의 ‘깊은 목마름’을 사랑한다는 섬 농부의 책을 읽었다. 처음 제목을 보고 당연히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귀농인의 바람으로 읽었다. 착각이었다. ‘나도 땅이었으면 좋겠다’는 소유가 아닌 존재에 대한 갈망이다!

‘농사의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쓴 김형표는 제주 성산면과 표선면 일대 13㏊(4만여평)의 땅에서 밀감과 당근·브로콜리·콜라비·비트·감자·옥수수·단호박 농사를 짓는다. 2007년 제주로 귀농한 입도 13년째 유기농 인증 농부.

그는 “나의 농사의 시작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척박한 제주에서도 더욱 척박한’ 밭들”이라고 말한다. 그가 돌 많은 섬의 땅을 어떻게 ‘씨만 뿌리면 농사가 끝나는 좋은 밭’으로 만들었는지, 지난한 노동의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주로 새벽 시간,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페이스북에 급하게 올린 거친 글들이었다는데, 한권의 책으로 엮은 농사 이야기는 땅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다. 다시 한번 놀랐다.

섬사람들에게는 뭍에서 굴러온 돌 같았을 사람(심지어 그는 강원 원주 출신이다)이 제주의 검은 흙에 단단히 박힌 암반을 부수고 돌멩이를 골라내 밭을 일궜다. 돌밭을 작물의 뿌리가 숨 쉴 수 있는 보드랍고 기름진 흙으로 바꾸는 게 그가 배운 농사의 시작이자 거의 전부였다.



“토양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차이는, 빛이 도달하는가, 산소가 공급되는가, 미생물 박테리아 등이 살아 있는가, 애벌레들이 기생하는가에 달려 있다. 뿌리가 깊은 작물들은 그 뿌리가 토양에 산소를 공급하게 되고 또 그 산소와 부산물을 먹이로 하는 미생물들이 기생하게 된다. 그 깊이까지가 생이고 그 어두운 아래로는 잠시 죽음의 상태로 있다(45쪽).”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흙을 만드는 사람이다. ‘잠시 죽음의 상태’로 머물던 곳을 ‘생의 깊이’로 가득 채우는 일. 저자는 그런 농사일을 두고 이렇게도 썼다. “자연은 땅 위에 녹색을 칠한다. 제주에서는 그 녹색을 벗기면 검은색이 나온다. 그 검은색이 마르면 갈색이 됐다가 비가 오면 짙어진다. 농사는 땅 위에 끝없이 선을 긋고 지우는 일. 선을 긋는 일도 시작이고, 선을 지우는 일도 시작이다.” 먼 바다 건너 당근밭에서 선을 긋고 지우는 그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책장을 덮는데 오래전 전남 진도에서 만난 어르신이 떠올랐다. 밭가에 심은 수선화 몇뿌리를 캐주면서 꽃이 아니라 흙이 아깝다며 알뜰하게 털어내던 우리나라 1세대 유기농 농부. 그때 처음 알았다. 흙이라고 다 같은 흙이 아니란 것을. 문득 ‘나도 땅이었으면 좋겠다’는 제목이 시적허용이 아닌 농부의 외침 그대로가 아닐까 싶었다. “10년 동안 성공하려고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큰 실패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고 고백한 저자는 차라리 땅이 되는 게 낫겠다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페이스북에서 저자를 찾아봤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비자와 직거래도 한다. 출간 당시 책 제목에 얽힌 에피소드를 써놓았는데, 원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였던 제목을 아내가 ‘땅이었으면’으로 잘못 읽는 것을 보고선 그대로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출간된 책을 보고 나처럼 ‘있었으면’으로 읽는 독자가 많다고. ‘소유냐 존재냐’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은 모양이다.

김선미<‘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한살림 큰 농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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