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밑줄 긋기]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두려움도 사라져…

입력 : 2020-07-29 00:00

작가의 첫 단편 소설집 이야기 연결돼 연작처럼 읽혀

해고 등 현실 문제 다뤄 먹먹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됐다. 핑계는 늘 있었다. 소설보다 더한 현실에 망연자실할 때가 너무 많았으니까. <자연사박물관>은 오롯이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 고른 책이다. 이따금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잠시 책장을 덮었을 뿐, 모처럼 손에 든 채로 끝까지 읽은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소설이 신춘문예 데뷔작이었다는 것도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 소개를 보고 알았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으려고 새해 첫 신문을 사 모으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됐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책은 크리스마스에 자연사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난 가족 이야기로 시작한다. 왜 하필 자연사박물관일까.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이 전시”된 곳으로 찾아간 주인공 역시 지금은 멸종되다시피 한 ‘대학생 출신 노동자 부부’다. 해고된 남편이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을 위해 철탑에 올라가기 전, 무너진 살림을 떠안고 있는 비정규직 아내가 가족을 태운 중고차 운전대를 잡고 잔뜩 겁에 질린 채 달려간 낯선 도시. 미로 같은 전시장 복도를 빠져나온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책에 실린 다른 단편소설들 속에 이어진다.



“그의 손가락은 정말이지 길고 아름다웠는데, 뭐든지 척척 고치고 만들어내는 그 손을 나는 사랑했다. 형편없이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 손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빛나게 바꾸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의 두손은 나의 미래였다(129쪽, ‘고흐의 빛’ 중에서).”



눈 쌓인 집 앞 쓰레기장에 거꾸로 처박혀 있던 소파를 가져와 고장 난 다리를 말끔하게 고쳐놓는 남편을 바라보며 아내가 한 말이다. 회사에 일억오천만원을 배상하라는 청구서를 받은 날이었다. ‘더 항소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면 손해배상은 취소해주겠다’는 협상 조건 때문에 만취한 남편은 아내가 사랑했던 그 손으로 집안에 분풀이한다. 엄마는 실수로 김치통을 쏟은 아이의 등짝을 후려치며 화를 내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내동댕이친다.

아내는 ‘재이’라는 아이 이름의 다른 단편소설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장벽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매번 벽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왜 매번 그림 속 사람들의 손발을 그리지 않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여덟살 난 딸 재이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게 없으면 힘들지 않을 테니까. 실수도 하지 않을 테니까….” 이들 가족의 기쁨과 슬픔은 모두 그 ‘손’에서 시작됐다.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연작이 있었기에 “나도 소설가가 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는 작가의 말 그대로, 2020년 세상 속 ‘난쟁이’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 유리 진열장 속에서 만나는 화석이 아니라 실재하는 이웃이니까. 철탑 위로 올라가면서 아내에게 “돌아갈 길이 없어”라고 말하는 남편이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유년의 상처와 마주하며 ‘인생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 주인공은 말한다. “한동안 공포와 싸우다보면 익숙해져요. 그러면 그것들을 만져보고 싶은 거예요. 혹시 알고 있나요?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두려움은 대개 사라진다는 걸요.” 그 말이 자연사박물관의 ‘긴 통로 끝에서’ 반짝이는 ‘초록빛 유도등’ 같았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걸까.

자연사박물관 / 이수경/강 / 216쪽 / 1만3000원

김선미<‘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한살림 큰 농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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