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경남 창녕군 대합면>
   
 

베트남에서 태어난 저는 한국에서 곽수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006년 1월, 스물세살의 저는 환상을 품고 한국에 왔습니다. 드라마에서 본 화려한 한국을 상상하며 경남 창녕 시골에 도착했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시동생 남자 셋이서 마늘과 고추·벼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른 남자들 사이에 끼어든 저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1월이라 집은 말할 수 없이 추웠습니다.

형님이 콩나물국 끓이는 법을 가르쳐주고 간 후 3년 동안 콩나물국만 끓였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한국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간신히 달걀프라이만 넘겼습니다. 남들보다 체격도 왜소한데 제대로 먹지도 못해 배고픔과 추위, 외로움과 낯선 환경에 한국행을 택한 걸 후회하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베트남 남쪽 바닷가 소읍에서 고기잡이하는 아버지와 오빠, 엄마, 언니 둘과 함께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편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도 벅찼고, 딱히 말할 곳도 없어 몸은 삐쩍 말라갔습니다.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시선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스물세살의 어린 여자가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뎌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가여우면서 기특합니다.

1남 3녀의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던 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한국의 세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들었지만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저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베트남어로 실컷 떠들고 고향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좀 나을 것 같았습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한국에는 부자들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였고, 현실은 찬바람 부는 가난한 농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정말 부지런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게 어느 순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서 기어이 한국 국적을 얻어 당당한 한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뚝뚝한 시아버지와 시동생·남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농사를 도왔습니다. 봄과 겨울에는 이웃 마을 가지 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일당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한국에서 꿈을 이루는 바탕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나무처럼 쑥쑥 커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TV를 보면서 한국말을 반복해 연습했습니다. 농협에서 하는 일대일 맞춤 영농교육 프로그램 후견인으로 인연을 맺은 유산마을 진상덕 부녀회장님은 저에게 살림·육아·농사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포농협의 곽미경 언니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지나 아들이 태어났고, 시동생은 결혼해 나갔습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 세끼를 챙기고 농사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벅찼습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잘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미경 언니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함께 수요일 저녁마다 마을회관에서 한글공부반을 열었습니다. 결혼이민여성 4명이 같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낱말을 익히며, 짧은 문장을 만들고 일기도 썼습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즐거웠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욕심을 냈습니다.

한국어가 어려워 아들을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후 남편과 농사일에 매달렸습니다. 미경 언니가 가지농사를 해보라고 권유해 시작했습니다. 전영환님 부부가 도와주었습니다. 같이 커피를 마시며 아이 교육과 집안일 등을 이야기할 때가 즐거웠습니다. 가지농사로 돈도 조금씩 불어났고, 아이는 학교에서 잘 적응해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시중을 드는데 쇠약해진 아버님이 불쌍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아버님 집에서 우리 가족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갈 곳도 없고, 11년간 아버님을 모셨는데 원망과 억울함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마을에 월세로 집을 구해 이사한 후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3년 동안 월세로 살면서 남편과 악착같이 일을 했습니다. 젊은 새댁이 억척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았고, 농사는 점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작지만 집도 장만했고, 땅도 조금 샀습니다. 남편이 무척 좋아해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저는 드디어 곽수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단번에 시험에 합격한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2013년 1월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온 작은 여자, 레응옥이엔은 한국인 곽수진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 생생합니다. 그때 주저앉지 않게 도와주신 분들, 이웃 할머니들, 가지농사를 짓게 해준 부녀회장님과 미경 언니. 이분들은 저의 은인으로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선생님입니다.

저와 남편은 올해 새로운 농사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하우스 3동 중 2동에 토마토농사를 짓기 위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을 잘 알기에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맛있는 토마토를 수확할 것입니다.

한글공부 시간에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아들은 이제 중학생이 됐습니다. 친구도 많고 착한 아들은 제겐 친구이자, 때로는 선생님이 돼줍니다. 엄마를 이해해주는 아들이어서 고맙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더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하겠다고 결심한 힘든 날들.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 일할 수 있고 남편과 잘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밝은 웃음을 나누며 행복한 삶을 꾸리고 싶습니다. 한국말 중에서 '좋다, 아름답다, 예쁘다, 잘한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 말들이 제 인생이 돼 아름답고 예쁘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한국 음식이 이제는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익숙해졌습니다. 아픈 지난날들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올겨울 토마토가 붉게 익으면 저 또한 더 단단한 한국인 곽수진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많이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이끌어준 분들이 참 고맙습니다. 한국 땅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끈기의 한국인 곽수진이 되겠습니다.




   
  [최종편집 :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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