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경북 안동시 서후면>
   
 

하루해가 너무 짧아 한줌의 햇살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요즘입니다. 생강 심기 마무리로 새벽부터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밭고랑에서 씨름 중입니다. 따가운 오후 햇살은 혈관까지 말릴 기세로 덤빕니다. 목이 말라 잠시 밭둑에 나와 허리 한번 쭉 펴고 주전자 물의 반을 비웁니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가에 엄마를 닮은 구름 하나가 천천히 지나갑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도 제가 많이 그리울까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저는 베트남 남부 호찌민 컨터시에서 멀지 않은 작은 시골마을 근냉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레티홍튀입니다. 제 고향은 열대과일이 많이 나고 벼농사만 1년에 3기작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집은 늘 가난했지요. 청각장애인이었던 어머니가 찰밥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어머니를 도와 들에 나가 이삭줍기도 했습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열세살에 학업을 그만두고 불교 사원이 있는 관광식당에서 잔심부름을 5년간 했습니다. 어머니와 제가 온종일 일을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스무살이 되던 해 TV에서 우연히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았습니다. 그때 드라마 속 배경인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그 주인공들처럼 예쁜 사랑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결혼정보회사 사장님께서 한국에서 온 청년이 신붓감을 찾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권유했습니다. 평소 한국을 동경해왔고,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선뜻 그러마했습니다. 그래서 맞선이라는 걸 봤습니다.

남편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알았습니다. 그가 내 운명이라는 것을요. 우리는 처음 만난 다음 날 베트남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월15일, 베트남을 떠나 한국으로 오게 됐지요.

꿈에 그리던 한국의 현실은 참 아팠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하루 전날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따뜻한 나라에서 추운 곳으로 시집오는 며느리가 걱정됐는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사고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공항으로 마중을 온다던 남편이 상중이라 오지 못해 한국에 온 첫날부터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저는 남편에게 서운했지요. 그런 저를 시어머니는 먼 곳에서 와줘 고맙다며 함께 잘살아보자고 다독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살이는 날이 갈수록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시각장애가 있지만 워낙 성실하고 착해 그런 것은 제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앞장서면 되니까요. 시어머니는 안동포를 짜며 저희가 하는 농사일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첫아이를 낳았고 열심히 일한 대가도 따라 송아지도 세마리나 들여놓게 됐습니다. 그러나 송아지가 다섯마리로 늘었을 때 구제역이 불어닥쳐 다섯마리 모두 묻어야 했습니다. 그 허무함과 상실감이 얼마나 컸던지요. 그러던 중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둘째아이가 태어나면서 슬픔은 더했습니다. 둘째아이가 선천성 녹내장으로 어쩌면 영영 실명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수술을 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서울까지 찾아가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힘든 상황 중에 시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다행히도 일어났지만 지금은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왜 나는 이래야만 되는지' 내 앞날의 삶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픔이 아물 무렵 셋째가 태어났습니다. 다행히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감사했지요. 세월이 흘러 넷째를 가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요즘 한국 여자들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며 말렸지만 저는 아이를 많이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렇게 넷째가 태어났습니다.

슬프게도 막내까지 시각장애로 태어났습니다. '왜 이렇게 내겐 시련만 있을까?' 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과의 다툼이 시작됐지요. 하루는 치매를 앓던 시어머니로 인해 남편과 크게 다퉜습니다.

속상하고 억울해서 의성에 있는 친구네로 갔습니다. 그날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고 앞으로 살아갈 희망도, 캄캄한 내 앞날에 닥칠 일들을 해결할 방법도 찾기 싫다는 내게 친구 남편이 그랬습니다. 아픈 아이를 두고 여긴 왜 왔느냐고, 누구든 아픔도 있고 시련도 있다고, 그걸 이기고 해결해야 하는 게 사람이라고요. 친구 남편의 진심 어린 충고에 힘든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동농협에서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교육을 해 참석하게 됐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 친구도 몇명 사귀었고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안동농협과의 인연이 제게는 천금 같았습니다.

지금 3㏊(약 1만평) 남짓 농사를 짓고 있지만 남편과 둘이 하니 작업이 늦어지기 일쑤입니다. 올봄에도 생강 파종이 늦어져 생강종구가 150㎏이나 썩어버렸습니다. 일이 늦어 낙담하고 있는데 안동농협 여성복지팀장님이 "영농 일손돕기 가정으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해 저를 눈물 나게 했습니다.

일주일 뒤 봉사자들이 와서 0.7㏊(2000평)의 고추밭에 고춧대를 순식간에 세워줬습니다. 안동농협 권순협 조합장님은 남편을 설득해 제가 안동농협 최초 결혼이민여성 조합원으로 가입하도록 도와주셨고, 운전면허와 농기계 면허도 취득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제겐 자신감과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남편을 설득해 트랙터를 융자로 사고, 트럭도 한대 구입했습니다. 수확한 농산물을 트럭에 가득 싣고 농협 공판장으로 가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 농협에서 하는 교육이나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해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는 농민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하는 일에 앞장서고 봉사활동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안동에서 잘 정착한 결혼이민여성으로, 멋진 여성농민이 돼 안동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안동농협은 제게 희망을 주는 동아줄이면서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살아가며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더 열심히 살면서 저같이 힘든 결혼이민여성을 도우며 갚도록 하겠습니다.

치매로 고생 중인 시어머니는 오늘도 제게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이웃들은 요양원에 모시라고 하지만 착한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기에 돌아가실 때까지 저희와 함께 사는 게 우리 부부의 바람입니다. 주위에는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농가주부모임 권후남 회장님이 그렇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은 만큼 감사한 맘으로 멋진 이웃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도움받은 만큼 베풀기도 하렵니다.


   
  [최종편집 :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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