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경기 용인시 처인구>
   
 
귀농을 하기 전에는 "살다가 힘들면 농사나 지으면 되지~"라는 말이 썩 괜찮아 보였다. 여유 있게 농사지으면서 유유자적하는 삶, 내가 생각하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귀농의 현실에는 내가 상상하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없었고, 살아내야 하는 순간들이 밀려오고 또 밀려올 뿐이었다.

2015년, 시각영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 교직을 이수해 예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부모님께서 경기 용인으로 귀촌 아닌 귀농을 하셨다. 9917㎡(3000평) 농지에 시설하우스 12동을 지었고 아파트를 떠나 농막으로 이사를 했다. 취준생이었던 나는 취업 전까지 부모님을 돕겠다고 했고 남동생도 휴학했다. 평생을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신다니. 분명히 두분만 하시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힘들었다. 씨를 뿌린 작물들은 일손이 얼마나 있는지 배려해주지 않고 자라기에,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정까지 랜턴을 켜고 작업을 해야 했다. 마을 어르신들도 참 많이 도와주셨다. 동기들은 도시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상자에 얼갈이배추 4㎏을 채웠다.

여름이 지나고 나는 도피하듯 유럽으로 43일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그 여행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유럽의 다양한 농산품과 농산물 가공품의 패키지, 그리고 매장마다 독특하게 진열된 상품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농업이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농민이 되겠다고 했다. 귀농한 후부터 농업은 블루오션이라며 농업 전도사가 된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지지해주셨다. 하지만 막상 아무런 지식도 없이 농업을 시작하려니 막막했다. 적극적으로 농업 관련 교육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용인시농업기술센터의 그린대학 신규농업인과를 최우수로 졸업했고, 귀농·귀촌 교육 성적 우수자로 선정돼 컨설팅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4-H 활동을 하며 청년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농장 이름은 큰그림농장으로 짓고 부모님과 일을 분담했다. 아버지는 파종과 재배 관리, 어머니는 수확과 인력 관리, 나는 유통과 마케팅을 맡았다. 역할을 분담하니 한결 수월해졌다. 초기에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만 납품하다가 로컬푸드직매장과 롯데마트에 입점했다. 그사이 농장 규모는 점점 확장됐다. 12동의 시설하우스가 어느새 45동이 됐다.

2018년 청년창업농에 선정돼 부모님의 농장과 멀지 않은 곳에 농지를 구입해 독립했다. 청년창업농으로 선발돼 받은 혜택은 농지 구입뿐만이 아니다. 매월 지원해주는 영농정착지원금도 큰 도움이 됐다. 9월에는 경인방송 다큐멘터리 '꿈꾸는 CEO 청년농부'를 촬영했다. 꾸준히 영농상황을 살피고 교육을 듣고 기업체와 연계해 봉사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한 것이 기회가 됐다.

내 농장이 생기니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내가 전공한 디자인과 교육을 농업에 활용해 6차산업으로 확장하는 것. 단순히 농작물을 수확하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예술활동으로 확대하고, 탄탄한 교육프로그램을 적용한 커리큘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정보를 수집하고 자격을 갖추기 위해 6차산업지도사 1급 자격증과 농촌체험학습지도사 자격증 등을 취득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체험농장 외에 치유농업과 사회적 농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농업으로 치유를 할 수 있다니, 처음 접하는 개념에 흥미가 생겼다. 치유농업 관련 자격증을 찾아보니 복지원예사(원예치료사)가 있어 한국원예치료복지협회 복지원예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미세먼지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삶의 패턴과 가치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농업의 6차산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기존 체험농장과 교육농장의 시스템을 보완한 스마트팜이 접목된 농촌복합커뮤니티를 계획하고 있다. 치유농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적 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농장이 되기 위해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한 공간설계를 진행 중이다. 앞으로는 주작물인 시금치·청경채·얼갈이 외에 허브류를 시험 재배할 예정이다.

농업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을 전공했지만 충분히 농업 현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청년이 농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년 전부터 원삼면 주민장학회를 후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앞으로 직업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더 넓은 시야를 갖고 미래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줄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표현처럼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려 한다.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우두커니 보내지 않고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하려 한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늘 기억하며 조금씩 더 나아갈 것이다.



   
  [최종편집 :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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