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제주 제주시 한림읍>
   
 
둘째를 임신했다. 밀레니엄에 태어날 아이였다. 내 나이 딱 서른에 남편의 고향으로 낙향했다. 원하지 않는 삶의 시작이었다. 세상일은, 아니 나의 삶은 나와는 상관없이 판단되고 결정됐다. 화가 났다. 제주시에 살 때도 남편은 어릴 적 꿈인 농부를 늘 꿈꿔왔지만 내게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 대학 강사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결혼할 때 내세우기 좋은 핑곗거리였지만 첫애를 키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월급이기에 남편은 친구가 하는 막노동 일자리에서 아르바이트를 겸했다.

그러던 중 막내시동생 내외가 혼전 임신해 갑자기 결혼 날짜를 잡게 됐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로 아파트 구하기가 어려웠고, 결혼 날짜는 촉박해지니 큰아들인 우리는 아파트를 비워주고 어쩔 수 없이 시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다. 마당 안에 안팎으로 집이 따로 떨어져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촌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했다.

친정엄마는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나는 젊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친정엄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심 남편을 무지 원망했다. 처음에는 시간강사로 시작했지만 겸임교수, 전임교수로 승진할 줄 알았다. '내가 농사나 지으려고 당신을 만났어? 농부가 꿈이라고 말했다면 당신과 결혼 자체를 안했을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시골살이가 시작됐다. 남편은 몇시간 되지 않는 강의를 다니고, 남은 시간에는 막노동 대신 비닐하우스 고추농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1년 셋째로 딸이 태어나자 우리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아이가 셋으로 늘어나자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남편은 강사도 때려치우고 고추 비닐하우스에 이어 양배추와 양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이 농사짓는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은 농사일에 지칠 줄 몰랐다. 본인이 꿈꾸던 농부가 돼가는 순간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딴마음이 있었다.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절대로 농사는 짓지 않으리라, 직장에 다녀야지 다짐했다. 그래서 육아 내내 가이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육아를 하며 공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커서 막내가 유치원에 들어가는 다섯살이 되자 공부를 포기하고 농사일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가 해질녘까지 땀범벅이 돼 돌아오는 남편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측은지심이 동해서 어느새 나는 자발적으로 남편과 함께 밭으로 가고 있었다. 같이 고추를 따고 양배추도 심고 양파도 심기 시작했다. '이렇게 둘이 하니까 되는구나' 싶었다. 일하는 재미가 솔솔 생기니 몸은 피곤해도 마음만은 가벼웠다. 남편의 일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일하니 괜스레 우월감도 생기고, 나 아니면 이 많은 일을 못해낼 거라고 생각하니 나의 존재감이 높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점차 농사일이 늘어나자 저온저장고의 필요성을 느껴 빚을 내 창고와 저장고를 지었다. 트랙터는 기본이고 비료 살포기에 트럭 2대, 정식기, 관리기 등 농사에 필요한 기계는 왜 이리 많은지. 농사를 하면 할수록 투자는 늘어가는 반면 농산물값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값이 그 값이니 어떨 땐 허무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비료값이나 각종 농약 대금을 한꺼번에 목돈으로 갚는 날이면 이렇게 농사를 계속 지어도 될까, 처음과는 달리 불안하기만 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갖춰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밭 임대료는 껑충 뛰었고 하루 일당은 20년 전보다 2,5배나 올랐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은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 아니 오히려 더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사를 지으며 아낄 수 있는 건 하루 일당이라 우리 부부는 한꺼번에 해야 할 일만 어쩔 수 없이 인력을 쓰고 있다. 제주도에는 수눌음 문화가 있어서 서로의 밭에 가서 일하며 우리 몸이 인력을 대신하기도 한다. 지금은 밭떼기거래가 줄고 개인 택배가 늘어나 우리네 농사꾼들이 할 일이 늘어가지만, 소비자와 생산자가 중도매인 없이 직접 연결되니 우리가 받고 싶은 값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9년 11월 우리 부부는 새농민상을 받게 됐다. 나는 '남편의 성실함 덕분에 이런 상도 받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농사는 내게 낯설고 힘든 일이다. 많은 돈을 벌진 못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늘 성실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농사가 좋다.

20년이 지난 지금, 남편의 말처럼 우리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농사짓기 잘했다며 모두 부러워한다. 정년 퇴임도 없고 잘릴 염려도 없고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안성맞춤이란다.

뜨거운 땡볕 아래서 일하지만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줄기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감성 풍부한 농부가 된 것이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는 일이 농사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몸을 움직이니 그 자유야말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농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 같다. 오늘 쉬면 내일은 뛰어야 하지만, 농부는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고 모레도 걷는 직업이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러 밭으로 간다.


   
  [최종편집 :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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