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충북 영동군 황간면>
 
   

"흰색 하이바, 오늘 일은 다 끝난 거야?"

"아유, 아저씨도 참.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논둑 정리 다 했으니 이제 감나무밭으로 가야죠. 호두나무밭은 무장공비가 나올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풀과의 전쟁입니다."

동그란 헬멧을 닮은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다. 논둑의 풀을 정리하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예취기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고 서둘러 감나무밭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낮잠이 없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낮잠을 주무실 수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낮잠이라는 건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요일이라고 해도 자식들의 늦잠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야윈 체격임에도 더워도, 추워도 밖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무서울 정도로 일을 하셨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내야만 하셨던 아버지. 열심히만 일하면 언젠가는 웃으며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가 온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날은 언제쯤일까. 오긴 오는 걸까? 가난은 줄기차게 우리 가족을 따라다녔다.

하루하루가 고되다고 생각해도 시간은 흘렀고, 어느 해부턴가 손 지문이 닳도록 일하셨던 아버지는 자그마한 토지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산비탈의 작은 밭, 동네 어귀의 네모반듯한 잘생긴 논 등이 아버지 이름으로 등기되면서 우리 집 허리는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그날은 논을 장만하고 처음으로 모내기를 하던 날이었다. 논에 물을 가두고 흙을 썰고 다져서 모들이 자리 잡기 편하도록 만든 다음 이앙기가 지나갔다. 가족 모두 우르르 나와 생전 처음 보는 것인 양 신기해하며 행복한 얼굴로 바라봤다. 난생처음 우리 논이 생겼고 거기에 싹을 심게 됐으니, 그것은 모내기가 아니라 축제였다. 닭을 잡고 술을 돌렸으니 잔칫날이 따로 없었다. 아끼고 또 아껴가며 살았던 아버지께서 너무나 좋은 나머지 일하는 사람들의 품도 넉넉히 계산할 정도였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그날, 아버지는 행복한 사치를 하셨다.

저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냘픈 모들이 심기자 아버지는 아예 논에서 사셨다.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삽을 들고 꼭 한바퀴씩 돌았다. 그러고선 밤이슬이 내리도록 잡초를 뽑고 논둑을 다졌다. 이른 아침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깜짝 놀라 받으니 아버지였다. 새벽녘에 깼는데 더는 잠이 안 올 것 같아 논에 나와 봤더니 벼들이 너희 크듯이 훌쩍 컸다면서 대견해하셨다. 밤사이 큰다 한들 얼마나 클까마는 아버지 눈엔 그렇게도 사랑스럽게 보였나보다. 아버지에게 있어 땅은 또 하나의 자식이었다. 가을이면 마당 가득 쌀가마니를 들여놓았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러 숨이 찰 지경이었다. '저 많은 쌀을 어떻게 다 먹는다지?' 괜한 걱정까지 했다. 조리에 쌀을 일면서 우리 집 형편도 함께 일어났다.

"햅쌀이 넘쳐나는데도 입맛이 없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아버지는 입맛이 도는 약이라며 지어오셨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입맛은 천리를 달아났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눈에 띄게 몸무게가 줄었다. 췌장암이었다. 암세포가 다른 부위로 전이돼 수술조차 할 수 없단다. 아버지는 수확을 끝낸 논밭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같은 몸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찬바람만 남는다. 유난히 추위가 길게 느껴지던 겨울이었다. 그러나 봄은 돌아왔다.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다. 땅은 씨앗을 뿌려 채워놓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도 살고 땅도 사는 것이다. 조금씩 일손을 거들던 내가 농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농기계라고는 호미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내가.

논농사는 계산이 안된 지 오래지만 아버지의 자식 같은 논을 휴경지로 두어서는 안된다. 육묘장에서 모판을 신청해 받아와 이웃의 도움으로 심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보조받은 흙과 자동기계를 이용해 모판에 흙을 채우고 볍씨를 파종해 모내기를 했을 터다. 질퍽거리는 논을 향해 출발하는 이앙기를 묵묵히 바라봤다. 모가 자리를 잘 잡는 것 같았다. 주인을 닮아가는지 껑충 키가 큰 모들도 보인다. '처음 하는 논농사인데 이렇게 잘되다니. 괜히 겁먹었네.' 자만심에 어깨는 한껏 올라갔다. 한번씩 논을 봐주던 어른들이 키가 큰 모가 보인다면서 병이 온 것 같다고 했다.

잘 크니까 키도 큰 게 아닐까 싶었는데, 유난히 키가 큰 벼를 뽑아 농협 경제사업장에 가서 보여주니 키다리병이라고 한다. 헛자람 및 괴사를 일으키는 병으로,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르며 수확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해 수확량과 품질을 떨어뜨린다며 약을 처방해준다. 물 온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과 함께. 논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물관리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물을 많이 넣어야 할 때, 빼내야 할 때, 그리고 논둑에 구멍을 내는 동물들 관리까지. 농사는 수확할 때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발걸음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한 밭에선 아버지와 함께 식재했던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7~8년생이 되자 제법 많은 양의 감이 달린다. 농약 사용을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농업기술센터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EM(유용미생물)을 500배 희석해 매주 살포했다. 3월이면 나무에 유황을 꼼꼼히 살포했고, 꽃이 떨어진 후 열매가 힘찬 초록을 보이면 살충제와 살균제를 혼합해 살포했다. 영양생장기에 맞추어 비료도 시비했다. 토양과 수질 등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체 유해성이 우려되는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고 직접 풀을 깎기로 했다. 깎인 풀은 병해충 방지와 퇴비 효과까지 높여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번도 예취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위험하다며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으니. 눈을 질끈 감고 시동줄을 당겨보았다. "푸드덕, 푸드덕." 수탉 날갯짓 소리만 들린다. 아무리 당겨도 힘은 힘대로 빠지고 시동은 걸리지 않는다. 고장이 난 걸까? 농기계수리센터로 달려가니 시동 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래도 무섭긴 하다. 온 힘을 다해 당겨본다. "윙~!" 그래, 이 소리다. 아무리 더워도 다리 보호대와 헬멧을 쓰고 풀을 깎았다. 어깨며 팔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지만 한번 두번 풀을 깎으면서 적응이 되자 요령도 생기고, 여유도 생긴다. 마을 어른들은 이후 흰색 헬멧을 쓰고 풀을 깎는 나를 보고 '흰색 하이바'라고 불렀다. 말끔하게 풀이 깎인 밭은 금방 세수를 마친 어린아이 얼굴처럼 예쁘다.

지난여름에도 어김없이 태풍은 찾아왔다. 비를 맞으며 늘어진 감나무 가지를 일으켜 세워 묶어주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비인지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10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했지만 또 다른 피해가 숨어 있었다. 태풍이 몰고온 많은 비 때문에 높아진 습도는 성숙된 감이 빠지는 생리적 낙과 현상으로 나타났다. 모두 난리였다. 자고 일어나면 감이 몽땅 빠져 있더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눈을 뜨면 감나무밭으로 달려갔다. 가을 햇살을 부지런히 받아 더 커지고 더 무거워진 감을 매달고 있는 나무에게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통했던 걸까. 낙과 하나 없이 감은 토실토실하게 노란빛을 띠며 잘 익어줬다. 곶감용 둥시는 농협 경매를 통해 판매했다. 깍지벌레·노린재의 공격 없이 깨끗하게 자란 감은 높은 가격을 받았다. 저녁에 감을 따 아침이면 경매장에 내었다. 눈여겨보던 곶감농가에서 해마다 밭 통째로 둥시감을 구입하겠다고 한다. 판로 걱정을 한시름 놓았다. 바쁜 농사일 속에서도 일기 쓰듯 틈틈이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기록했다. 퇴비를 뿌리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농민의 역할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았다. 대봉감이 익어가자 페이스북 친구들을 초대해 팜파티를 열었다.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 농장도 방문하고 직접 감을 수확해볼 수 있도록 했다. 보기만 했지 감을 처음 따 본다는 분도 계신다. 수확한 감을 한아름 가져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감을 닮아 선홍빛이 된다. 일부는 택배로 판매했다. 나도 판매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다. 과일을 받았을 때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 있으면 언짢다. 특히나 후숙 과일인 대봉감은 딱딱할 때는 모르지만 홍시가 되면 멍이 든 곳은 시커멓게 표시가 나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한개 한개 스티로폼망으로 포장해 상자에 넉넉하게 담았다. 감나무밭을 정리하면서 "고맙다, 고맙다." 속삭여주며 감사의 비료를 시비했다. 그렇게 한해 농사가 마무리됐다.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에 적응이 더디고 뒤처진다고 농업을 세련되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농사는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다. 농부는 생산량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늘을 탓하고 밭을 탓하지 않는다. 올해 농사가 잘 안되면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된다. 그렇게 생명을 살려나가는 것이다.

먹거리를 생산한다는 것은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채워주는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적은 양이라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가치를 알아주는 세상으로 더 확장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오늘도 아버지의 숨결이 가득 배어 있는 들녘으로 향한다.


   
  [최종편집 : 2020/11/17]

 
   
농민신문사 홈페이지 메인화면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