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전남 순천시 승주읍>
 
   

“한선새엥! 현미 둘이라고 했지라?”

마당에서 네살배기 진돗개인 써니와 공 뺏기 놀이를 하고 있자 이웃집 형님의 말이 돌담을 타고 넘어왔다. 방아를 찧어왔으니 가져가라는 얘기였다. 손수레를 끌고 가 현미를 두포대 싣고 돌아서자 형님이 “잠깐만”을 외치며 창고로 향했다. 잠시 가벼운 실랑이가 일었다. 그러는 사이 현미 포대 위에 쌀이 한포대 올려졌다. 그리고는 형님이 또다시 “잠깐만”을 외치며 창고로 향했다. 하나 더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시 실랑이가 일었다. 형수님도 툇마루까지 엉금엉금 나와 성화였다.

“우리 농사를 두분이서 다 지어주셨는데. 못자리할 때도 두분이 오셔서 해주셨지, 콩 타작할 때도 도와주셨지, 고추도 심어주셨지, 벼 말려 담을 때도 도와주셨지, 볏짚 묶고 쌓을 때도 도와주셨지, 해마다 매실·밤·감·두릅도 팔아주시지, 참말로, 참말로….”

“그럼 저희 밭 갈아주신 값도 드려야 되고, 매실·감·밤·쌀도 매상값으로 주시고 덤까지 듬뿍 주셨으니 그것도 전부 다 다시 계산해드려야 돼요.”

그러나 형님은 허리협착증·고관절염·무릎 수술한 병신한테 갖다달라고 하지 말고 온 김에 하나 더 싣고 가라는 말만 되뇌었다. 나는 그렇게 복잡하게 계산하며 살지 않겠다며 서둘러 손수레를 끌고 나왔다. 형님의 지청구가 뒤따랐으나 뿌리치며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형님의 지청구가 돌담을 타고 넘어오더니 형님이 기어코 쌀 한포대를 어깨에 둘러멘 채 들이닥쳤다. 대문을 사이로 또다시 실랑이가 일었다.

새삼 6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멀리서라도 지리산을 바라보며 살자던 젊은 시절의 꿈을 위해 4년여를 찾아 헤매다 거짓말처럼 찾게 된 곳이 이곳 연동마을이다. 전남 순천 시내에서 승용차로 굽이굽이 산길을 30여분 달려와야 하는 산골마을이다. 지방도로를 뒤로한 채 산자락을 따라 휘우듬한 길을 올라 저수지 뚝방에 다다르면 그때서야 ‘짠!’ 하고 나타난다. 8가구가 300~400m의 산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소꿉장난하듯 오밀조밀 모여 사는 그림 같은 동네다.

그 마을의 첫집이었다. 집 뒤가 산이고 대문 앞이 축구장 서너배 크기의 저수지인 말 그대로 배산임수였다. 아내의 소원대로 담을 사이로 이웃과 담소를 나누고, 밥을 안쳐두고 집 앞 텃밭에 가면 한끼 찬거리가 간단히 해결되는 그런 집이었다. 귀농·귀촌 기피지역 1순위가 집성촌이라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뭐, 하는 마음이었다. 어디 가든 나 할 탓이란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 궁리한 게 동네분들께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기로 했다. 로마에 갔으니 철저히 로마의 법을 따르자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왔다고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오해를 살 만한 말과 행동을 조심하자 했다. 알아도 모르는 체 물어보고,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을 맞춘 채 안부를 묻고 날씨·농사일 등 화제불문하고 대화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거리감을 좁히며 보이지 않는 담을 헐어버리자는 얘기였다.

이사 후 대충 집안 정리를 마치고 떡을 돌렸다. 아내와 함께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든 채 집집을 찾아다니는 기분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하나같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반색을 하는 모습들은 가히 감동이었다. 야콘농장 집에선 판매용인 야콘즙을 한움큼 안겨주질 않나, 어느 아짐은 다니러 온 아들네의 나물보따리에서 알싸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 취나물을 듬뿍 내어주기까지 했다. 이장 부부는 다음날 화장지 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귀촌생활이 6년째다.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안마당 평상에 홑이불을 덮고 누워 현란한 밤하늘에 취하는 게 일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쌍안경을 목에 건 채 별과 새를 관찰하기도 했다. 죽어도 좋아를 연발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만끽하는 것이다. 67년 인생에 처음 겪는 마음부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까치발을 한 채 돌담을 사이로 형수님과 장시간 담소를 나눈 아내가 쪼르르 달려오며 가스차단기를 외쳤다. 며칠 전 형수님이 가스불 잠그는 걸 깜빡해 하마터면 형님네뿐 아니라 우리 집까지 잿더미를 만들 뻔했다는 얘기였다. 바로 인터넷으로 가스차단기를 주문했고, 주말마다 오는 형님네 막내에게 설치를 맡겼던 것이다.

형수님은 “참말로 고맙습니데”를 연발하셨고, 형님은 거푸 얼마를 줬냐고 캐물으셨지만 인터넷에서 싸게 샀다며 얼버무렸다. 그동안 형님네서 신세진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일랑 앞마당의 감나무에 묶어놓으시라고 했다. 이렇게 좋은 동네에서 이웃사촌으로 생각해주셔서 정붙이고 살게 해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겼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텃밭에서 아내와 함께 마늘과 양파를 심고 있자 형수님이 지팡이를 앞세운 채 허위허위 다가오셨다. 은근히 긴장이 됐다. 밭으로 일부러 찾아오신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힘겹게 밭둑에 주저앉으신 형수님은 비료·농약도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농사를 잘 짓냐며, 평생 농사지은 사람들보다 더 잘 짓는다며 치하하시기 바빴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아내의 옆구리에 봉투를 찔러 넣으신 후 도망치듯 일어섰다.

아내가 돈봉투를 든 채 뒤쫓아가 형수님의 손에 다시 안겼다. 잠시 밭둑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내가 밭으로 들어와 하던 일을 하려 하자 형수님이 밭까지 쫓아 들어오셨고 밭에서 난데없는 돈봉투 돌리기 놀이가 벌어졌다. 돈봉투 돌리기는 형님네 집까지 따라가 계속됐고, 대문 사이로 집어넣기, 돌담 너머로 패스하기로 비화됐다. 정 이러면 앞으로 말을 않겠다는 형수님의 엄포에 난 말도 않고 보지도 않겠다고 응수했다. 길에서 만나면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공갈·협박도 소용이 없었고, 결국 우리가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형님과 형수님의 차고 넘치는 인정과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더이상 돈봉투 돌리기 같은 실랑이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달라는 대로 드리고 다른 방법으로 보답하며 살기로 했다. 세상은 이렇게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것임을 몸으로 일러주시는 두분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기로 한 것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짜릿짜릿 엔도르핀이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새삼 절감한다.

   
  [최종편집 :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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