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ㆍ충남 홍성군 홍북읍>
 
   

필리핀 결혼이민여성인 동료와 함께 양봉작업장 천막에서 로열젤리 채취를 위해 애벌레를 옮기는 이충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이들이 험한 길을 지나 산속 작업장까지 찾아왔다. 그중에는 충남 홍성군 양봉협회장을 맡았던 분도 계셨는데, 그분이 나를 불러 소개했다.

“조경철씨 아내인데, 로열젤리 작업을 잘하는 일인자예요.”

그 일인자라는 말이 쑥스러우면서도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 양봉작업장에서는 외국인 근로자 3명, 필리핀 결혼이민여성 2명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젤리틀 하나에 쩔쩔매고 있을 때, 네번째 틀작업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일인자’라고 한 것 같다. 이렇게 일인자가 되기까지의 사연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필리핀 제너럴산토스의 조그만 동네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록 빈민들이 모인 동네였지만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언니·오빠들은 생활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자립했으나 막내인 나는 아빠의 사랑 속에서 대학공부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 직전 아빠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마지막 학기 학비를 내지 못한 채 학업을 그만뒀다. 엄마는 아빠의 병간호보다는 당장 먹고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아빠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치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빠는 3년을 못 넘기고 결국 55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이후 한국으로 시집간 친척 언니가 마음씨 착한 남자라며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줬다. 착한 남자라는 말을 믿고 결혼해 2008년 한국으로 건너와 꿀벌 키우는 일을 도왔다. 처음엔 수없이 많은 꿀벌에 쏘여 아파서 울기도 했고, 얼굴이 퉁퉁 부어 괴물처럼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고생시켜서 미안해”라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면 나는 “괜찮아! 당신과 함께라면 이보다 더한 고통도 참을 수 있어”라고 말하며 남편을 안심시키곤 했다.

남편이 젊고 건강했을 때는 많은 봉군을 갖고 이동양봉을 하며 양봉원 대표로도 일했다. 하지만 근위축증이 발병하면서부터는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돼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내가 힘을 보태면 큰 뜻을 이룰 것 같았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남편이 알려준 대로 로열젤리 생산과 꿀벌 관리를 열심히 했다. 주로 새벽에 일어나 오전 중으로 꿀벌 관리를 마치고, 오후에는 다문화센터에 가서 한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다시 남편의 물리치료를 위해 병원에 따라가 뒷바라지했다.

평소 홍성군 양봉협회 모임이나 꿀벌 관련 세미나 등 각종 행사에 함께 참석하고, 쉬는 날에는 한국의 양봉 대가로 불리는 여러 양봉농가를 찾아가는 견학 겸 여행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로열젤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남편 친구네 꿀벌농장도 찾아가 새로운 로열젤리 체험 실습도 했다. 그곳에서 터득한 로열젤리 생산법과 남편이 일러주는 방법을 응용하다보니 2배 이상의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꿀벌에 쏘이는 아픔을 참고 이기며 끈기를 갖고 꿀벌과 함께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또한 70% 이상의 농작물이 꿀벌로 수정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자연환경과 생태보전에도 꿀벌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셋째를 낳을 때까지 친정어머니와 언니가 자녀들의 육아를 도와주셔서 양봉에 관련된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넷째를 낳고부터는 양육에 바쁘다보니 남편 혼자서 꿀벌을 키워야 했다. 이후 남편은 무리한 탓인지 어깨와 팔로 병 진행이 빨라져 힘들어했다. 팔과 어깨를 쓰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워 내가 일으켜 전동휠체어에 옮겨줘야 활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여러가지 검사를 했다. 근위축증으로 약해진 팔과 어깨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오십견과 목디스크가 생겨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아파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나는 매일같이 꿀벌을 이용해 벌침을 놓아줬다. 수술 날 병원에 갔는데 목디스크가 나은 것 같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던 중 다섯째를 갖게 돼 자녀 양육에 바빠 어쩔 수 없이 남편이 평생 함께했던 양봉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나는 양봉을 그만뒀지만 꿀벌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남편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꿀벌 정보를 계속 찾았다. 그동안의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해 글을 쓰고 책처럼 편집했다. 또 편집한 자료로 귀농인들에게 교육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양봉을 다시 시작했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우리 부부는 홍성군다문화센터에서 행복한가정상을 받았고, 나는 한국지체장애인협회로부터 전국 장애인 배우자 여성상도 수상했다. 또 남편의 근위축증 치료에 힘을 보태고자 물리치료학 공부를 하고 싶어 시간을 쪼개 한국어능력시험 공부도 하고 있다.

남편의 병을 두고 30세를 넘기기 어렵다는 의학적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를 넘어섰다. 50세까지 걸어다니며 생활했고, 지금은 전동휠체어에 의지하지만 6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결혼초 시숙께서 “남편의 근위축증 유전자가 자녀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니 자녀들을 낳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5명의 자녀를 낳았고, 첫째인 딸은 높이뛰기·멀리뛰기 등 육상선수 일인자로 학교에서는 물론 충남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받아왔다. 남편이 큰딸에게 “아빠가 병을 얻어 운동을 제대로 못하는 한을 풀어준 것 같다”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다른 자녀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 같다”고 칭찬했다.

바라는 꿈이 있다면 대학에서 물리치료학 공부를 해서 마음씨 착한 남편이 앓고 있는 병의 진행을 늦추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또 보물과도 같은 5남매들이 현재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 무엇인가 한가지씩 ‘일인자’가 돼 더불어 함께하는 꿀벌과 같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최종편집 : 20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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