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으로 시집온 지 벌써 20년이 됐으니 그새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 건가. 둘째 형님께서 예쁜 꽃다발을 들고 공항으로 남편 친구들과 함께 마중을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좋은 직장 다 버리고, 나서 자란 만주 헤이룽장성을 떠나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작은 시골로 용감하게 시집온 나의 선택은 지금 다시 돌아봐도 스스로 놀랍다.

공항에서 약 한시간 반쯤 지나 집에 와보니 어머님과 큰 형님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 결혼식을 올리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

시집살이가 뭔가 했더니 어렵고 힘든 인간관계가 곧 시집살이였다. 갈등은 서로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답답함과 분노는 소리 없는 외침이 됐고, 불안함과 경계심에 휩싸인 내 모습은 오기가 돼 나를 찌르고 옆 사람도 찔렀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참고 살아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나에겐 없었다. 남들은 결혼하면 분가를 시킨다는데, 큰아들도 아닌 우리를 붙잡고 있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집안 분위기는 항상 침묵이 흐르는 폭풍전야였다. 밝고 명랑했던 내 얼굴에서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됐고, 마치 성난 장닭처럼 신경이 곤두서 눈썹에는 항상 힘이 꽉 실려 있었다. 싸우지는 못하고 벼르기만 하는 성난 장닭 모습이 꼭 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 마음속엔 온통 미움만 가득했다. 남편이라도 내 속을 풀어줬으면 좋으련만…. 맙소사, 남편이라는 작자는 당신 부모들과 문제가 생겨도 내가 나서 풀 때까지 손 놓고 있으니 그런 남편에게 어찌 위안을 받으랴.

결국 우여곡절 끝에 4년 만에 분가했다.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성난 장닭은 뚝심으로 이기듯, 그 와중에도 셋방살이하면서 두딸과 아들 삼남매를 낳고 애들과 남편을 챙기는 생활력 강한 아낙으로 변했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과 치과를 다녀오는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옆 동네 목장집 아들인데, 주변에 목장 할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거였다. 통화가 끝나고 우리가 인수하자고 했더니 남편도 좋아했다. 남편은 20년 넘게 목장에서 조사료를 파종하고 수확하는 일을 전문으로 해왔기 때문에 평소에도 소를 기르고 싶어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목장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남편과 의논을 하는데, 36개월 된 아들이 달려와 ‘음매목장’이라고 말하며 내 가슴에 꼭 안겼다. 이렇게 아들의 작명으로 ‘음매목장’이 탄생했다.

2005년 3월부터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값싼 육우 송아지를 사들여 우유를 먹여 키웠다. 그때 내 생각에는 혼자 부업으로 몇마리만 키우려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100마리가 됐다. 완전 초보자가 소를 키운다는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할 지경인데도 아침저녁으로 쑥쑥 커가는 송아지들을 보노라면 은근히 뿌듯하고 보람이 느껴졌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육우들을 몽땅 팔아 한우 임신우 36마리를 사들여 본격적으로 한우 사육을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축사여서 일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기에 거침없이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소 키우는 것보다 힘든 게 신랑이다. 소는 주는 밥 잘 먹고 주인 잘 알아보고 새끼 잘 낳아 돈까지 벌어주는데, 신랑은 귀한 부인한테 함부로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어쨌든 남편은 수학문제보다 더 어렵다. 한가지 칭찬이라면 생활력이 강해 일만큼은 일당백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100점짜리 가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 소들은 쑥쑥 새끼를 낳았다. 농장의 이름을 잘 지어서인지 ‘음매목장’은 쌍둥이 송아지가 소문나게 많이 태어났다. 어미는 어찌나 새끼를 잘 챙기는지 사람보다 자식 사랑이 더 끔찍하다. 갓 젖 뗀 송아지들을 어미와 떼어놓으면, 새끼는 밤낮 목이 터져라 울어댄다. 그렇게 홀로서기가 시작되면 송아지들은 요리조리 눈치도 보고 이리저리 궁금한 것에 기웃거리기도 한다. 좀더 크면 수송아지들은 사춘기 중학생들처럼 뛰쳐나가려고 잔머리를 잔뜩 굴린다. 그렇게 자란 놈들이 지금은 200마리가 넘어 내 버팀목이 됐다.

2010년 12월은 구제역이 발생해 수많은 축산농가에서 자식처럼 키우던 소들을 매몰해야 했던 너무도 잔인한 달이었다. 윗동네에서 구제역 예방차원으로 돼지와 한우를 완전히 싹 쓸어버렸다. 다행히 우리 농장은 제한거리에서 간신히 비켜나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사철 수확한 조사료가 소들의 건강을 지켜줬다. 고급육 생산에도 도움이 되고 사료비도 많이 절감됐다.

2011년 2월 중순 구제역이 해제돼 비육 잘된 소를 팔아 4600㎡(1400평)짜리 새 축사를 지었다. 누구보다도 시어머님이 좋아하셨는데, 결국 축사 완공을 구경 못하시고 83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좀 잘 해드릴 걸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과 후회도 많이 했다. 49재를 지내고 아버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나는 시아버님을 큰 유산으로 물려받아 모시게 됐다.

막내 시누이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하는 소리가 “우리 아버지는 무슨 복이 있어서 말년에 저렇게 편하게 사실까”다. 며느리로서 그것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만 4년을 사시고 딱 2주 병원에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나한테 고맙다며 “너희들은 잘될 거야”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아버님은 나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유산이셨고 풀기 어렵던 인간관계 숙제가 풀리는 귀한 깨달음을 주신 스승이셨다.

2014년 추석에 KBS의 전국 한우농가 <도전 한우 골든벨> 프로그램에 출연해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또 좋은 일은 2015년 충남 농업마이스터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배움은 끝이 없다더니 젊은 시절 대학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농장마다 장점을 서로 공유하고 국내 최고의 교수진과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강의를 좋은 환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마이스터대학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했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순천대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도 참가했다. 그 회의에서 ‘국내산 조사료 한우 완전배합사료(TMR) 적용, 육질경영개선’이라는 주제로 우리 농장의 사례를 40분 동안 발표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 순간이 ‘음매농장’ 목부로서뿐 아니라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고 한단계 성장하는 이정표로 자리 잡았다.

지나온 과정은 힘들었지만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여정에 눈물과 땀이 함께했다는 것이 너무도 소중하다. 지난 날의 이야기가 오늘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늘의 이야기도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득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최종편집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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