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경남 남해군 서면>
 
   

아내, 두아들과 무작정 찾아온 한려해상의 중심 경남 남해. 우리 가족이 정착한 마을은 섬인데도 바다가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농촌이다. 큰아이의 아토피가 심했고 어린 시절에는 자연에서 뛰노는 추억이 필요하단 명분을 내세웠지만, 본심은 삭막한 도시를 떠나 자연을 느끼며 여유 있는 시골생활을 즐겨보자는 거였다. 아내는 후자는 모른 채 남편을 믿고 귀촌에 동의했다.

하지만 시골집을 뻥튀기 된 가격으로 산 것에서부터 어설픈 인테리어, 날마다 생기는 마을 대소사의 꾸준한 참석, 그리고 농번기가 되면 이른 아침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나까지…. 자기계발과 비전이라곤 찾기 어려운 농촌생활이 거듭되자 아내의 불만은 점차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한 농가가 우리 집을 찾았다.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우리보다야 젊고 컴퓨터도 잘한다고 하니까, 우리도 직거래를 한번 했으면 싶은데 혹시 도와줄 수 있는가?”

처음에는 거절했다. ‘젊어서 잘할 것이다’란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한 막무가내 부탁이라 여겼다. 도시에서 인터넷 관련업으로 먹고살았고, 컴퓨터만 들여다봐 왔기에 이런 종류의 일 자체가 싫었다. 잘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간곡한 부탁이 이어지니 고집을 꺾고 잘되든 안되든 같이 해보기로 했다.

첫 작물은 콜라비였다. 양배추와 순무의 교배종으로 제주도와 따뜻한 남해안 지역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다. 우선 농가의 블로그부터 만들었다. 일주일에 세번씩 만나 모든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 논밭을 쫓아다니며 일손을 거들고, 틈틈이 사진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함께 사진을 보며 농사현장의 모습을 블로그에 담았다. 블로그 시작 2주 만에 첫 주문이 들어왔고, 첫 주문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두번째·세번째 주문이 이어졌다.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본격적인 판매 확장에 나서보자고 내가 먼저 권유를 했다. 당근과 같은 신선 농산물의 미판매분으로 말랭이를 만들어 구색도 늘렸다. 쌀 판매도 준비했다. 쌀 판매는 참 어렵다. 누구나 필요하지만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는 농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 중에 찾는 사람은 적지만 마니아층이 분명한 ‘분도미’로 접근했다. 예상대로 초기 판매량은 적었으나 재구매가 늘어 농가에서 고가의 최신 도정기를 사야 할 만큼 성과가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땐 성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도 들었지만 다행히 판매량이 늘어 바빠진 농가를 보니 흐뭇하고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두번째 농가를 도와드리게 된 건 나도 모를 이끌림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평생 농촌에서 자라 농사 하나는 자신 있다고 했다. 내가 아직 큰 농사를 짓지 않고 있으니 농사도 배울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농가는 농사일이 많아 직거래로 1년 365일 꾸준히 판매하기는 어려웠다. 농사일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직거래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농가에서도 매월 점진적인 판매보다는 농작물의 출하 시점에 맞춰 대량판매되기를 원했다.

첫작물은 마늘이었다. <남해마늘>은 지리적표시제 농산물로, 다른 지역 마늘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었다. 이 점을 살려 출하시기에 맞춰 고객에게 배송하는 예약판매 방식으로 사전 예약접수를 시작했다. 한달도 되지 않아 예약접수가 1000㎏을 넘었다. 농부는 예약자들이 입금한 돈에 놀라면서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해 마늘농사가 흉작이었던 것이다. 작황이 좋지 않아 예약된 양의 절반 정도만 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예약가보다 경매가가 높게 형성돼 직거래를 통한 수익창출도 실패하고 말았다. 가격은 농가와 상의해 결정한 것이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격산정의 중요성을 크게 실감했다. 농가에서는 다른 농가의 마늘을 사 예약자에게 보내겠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내가 예약자에게 일일이 전화해 환불처리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질책으로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 농가의 첫 직거래는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모두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덕분에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다음 작물은 시금치였다. 겨울시금치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산지경매가 진행되는 남해군의 겨울철 대표 농산물이다. 산지경매 참여자가 적고, 일별 산지 출하물량의 등락이 커 경매가격이 하향 평준화된 농산물이기도 했다. 농가에서도 하루하루의 가격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시금치 직거래판매는 ‘생물이라 힘들다’는 편견을 깨고자 더욱 공을 들였다. 사전에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온도와 기간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주문과 발송도 하루 단위로 했다. 농가에서도 시금치의 상품성을 높이려고 손질에 신경을 썼다. 나도 시금치가 판매되는 3개월 동안 매일 농가를 찾아가 시금치 수확·손질을 관찰하고, 사진도 찍어 고객들에게 산지 소식을 전했다. 첫 주문이 시작되고 보름쯤 지나자 많게는 하루 50박스의 시금치가 팔려나갔다. 농가에서 수확과 손질을 맡고, 내가 포장과 택배를 담당했다. 농가는 포장과 택배 업무를 지원받자 시금치의 상품성 향상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었고, 나는 농산물 직거래판매에 대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농가와 농사일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다.

직거래의 성공 기준은 농가별로 다르다. 어떤 농가는 판매량이 적더라도 구매자가 만족한다는 얘기에 보람을 느꼈고, 어떤 농가는 힘이 더 들더라도 수익이 개선돼 만족해했다. 또 다른 농가는 직거래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이제는 농가에서 직거래를 해보고 싶다고 문의해오면 ‘왜 하고 싶은지’를 가장 먼저 묻는다. 그리고 농가에 깊숙이 들어가 농가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적절한 방식을 찾아준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농가마다 다른 점이 정말 많다. 부부가 함께 농사일을 하는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지, 마을의 품앗이가 되는지, 농부의 성향, 논밭의 위치, 재배면적, 농사경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수가 있다. 각 농가의 상황에 맞춰 직거래에 접근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다.

아름다운 관광지 남해군으로 귀촌해 펜션·게스트하우스·카페를 하거나 전원주택에서 폼 나게 살지는 못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농가의 부름이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어설픈 귀촌에 동참해준 가족들도 저녁이면 ‘꽃거지’ 꼴이 돼 들어오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농가의 직거래는 행복과 수익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작은 파랑새임이 틀림없다. 현실에서 도피하듯 내려온 이 농촌마을에서 이젠 파랑새를 키우는 작은 새장의 주인이 되고 싶다.

   
  [최종편집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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