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경북 고령군 성산면>
 
   

2006년 여름. 유레일패스 한달분과 비행기티켓, 그리고 현금 50만원을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꿈 많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 앞으로의 나에게 진정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회의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었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주말에 건설현장을 다니며 용돈벌이를 했다. 대구 달서구의 한 고시원에 살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고3이 되면서 공부가 하고 싶었다. 공부만이 내게 다른 삶의 길을 터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시원비와 버스비가 부담스러웠다. 그때부터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6개월간 교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며 공부의 꿈을 키웠다. 이후 대학교에 들어갔고 전역을 하고 나선 다시 열심히 공부했다. 덤으로 장학금도 따라왔다.

2006년 봄이 왔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청량했던 기억이 난다. 봄내음이 그윽할 무렵 좌절이 찾아왔다. 치솟는 대학 등록금으로 인해 불안해진 미래는 스스로 용기를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넘치던 자신감은 오만이 돼버렸고, 책을 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다. 지금도 힘들 때면 생각나는 그때의 여행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학교로 돌아온 후 교환학생 프로그램(EMU)을 접하게 됐다. 전공인 경영학의 꿈을 키우기 위해선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8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캐나다로 떠났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교환학생프로그램으로 학사학위를 받기 위해 우선 미시간 국경지대인 해밀턴으로 가서 그쪽 문화와 분위기를 익히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희망찼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건축일은 힘들었지만, 기술도 배우고 재미도 있었다. 주경야독을 하며 화려한 날들을 꿈꿨다. 정체된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공부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월세와 생활비에 시달렸고, 10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뛰어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주변을 돌아봤다. 부모님이 작게나마 멜론농사를 짓고 계셨고, 농작물을 잘만 팔면 돈이 될 듯했다. 지인들과 길거리에서 멜론장사를 시작했다.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물건을 팔다보니 문제가 있는 상품들이 가끔 말썽을 부렸다. 생산 기반부터 잡겠다는 생각으로 그해 농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친 후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을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혼자 지은 첫 멜론농사는 실패였다. 관행적으로 해왔던 부분들이 미심쩍기 시작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농촌진흥청의 멜론농사 교육을 알게 됐고 열심히 배웠다.

1년이 지나자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멜론의 맛과 색깔이 좋아졌고 수확량 역시 목표치에 도달했다. 하지만 비닐하우스 5동이라는 작은 규모는 농사를 짓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고심 끝에 찾은 답은 1년에 멜론을 세번 심는 것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파이프 구입비 등 비닐하우스 한동에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이런 고민을 할 때 “내 이번에 하우스 파이프 새로 바꾼다. 구형 니가 가져가라. 돈은 내년에 벌어서 주면 된다”며 벌초대행 부업을 같이 했던 성기흔 형님이 도움을 줬다. 이렇게 해서 만든 15개동의 9m 비닐하우스는 큰 소득을 가져다줬다. 2011년엔 후계자자금을 더해 6600㎡(2000평)가 넘는 땅을 매입했다. 농사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여자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할 정도의 자신감도 갖게 됐다.

여자친구는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녀는 도시인 대구에서 자라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자친구 생일이면 2t짜리 물탱크를 실은 청색 트럭을 타고 영화를 보러갔다.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주차 요원에게 제지를 당할 때면 우리는 당당하게 “영화 보러왔어요”라고 했다. 3년 정도 연애를 하고 2012년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다.

이 무렵 토경재배지를 양액재배 시설로 전환하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비료의 개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했고, 2014년 토마토를 첫 수확했다. 갑작스러운 투자로 어려움을 겪은 데다 양액재배는 쉽지 않았다. 수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농업의 특성상 자금 압박도 커졌다. 생활비도 제대로 주지 못했지만 아내는 싫은 내색 한번 없었다.

아내의 든든한 응원 덕분에 양액재배를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문제가 생길 땐 같은 작물을 키우는 형님들과 머리를 맞대며 해결했다. 점점 토마토 식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아가 고령군 가야금토마토연합회를 만들게 됐다. 지금은 가야금토마토연합회 사무차장직을 수행하며, 임원들과 함께 신규사업에 대한 다양한 방향성과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2015년 가을에는 또 한번 도약의 길을 걸었다. 아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제2농장 신설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행착오와 인력 수급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올봄부터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로 인한 자금난도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게 되면서 아내에게 “니는 뭐 믿고 내랑 결혼했는데?”라고 물었더니 “밥은 안 굶길 것 같더라고”라며 생긋 웃었다.

처음 농업에 뛰어들면서 5년 안에 법인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었다. 아직 그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앞으로 5년 안에 비전을 갖고 진짜 경영을 하는 영농법인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고령군 4-H연합회 회원 동생들을 만나면 난 어김없이 말한다. “꿈을 갖고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다보면 도중에 목 마르다고 물 주고, 땀 흘린다고 수건 건네주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분들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면 어느덧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옛말에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구해진다)’란 말이 있다. 이 시간이 아깝지 않게 젊음을 불태우자. 형도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최종편집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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