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제주 제주시 한림읍>
 
   

2011년 겨울. 배낭 하나 메고 제주에 홀로 여행을 왔다. 답답했던 그 당시 상황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라산 정상을 세번이나 오르고 열흘 넘게 올레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제2의 인생’을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와 딸에게 시골살이를 하자고 이야기했고, 가족 모두가 동의했다. 제주에 전혀 연고가 없던 우리 가족은 무조건 한림읍사무소를 찾았다. 우리 세가족이 제주에서 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는지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공무원은 본인이 사는 귀덕리를 소개해줬다. 2012년 4월24일. 마침내 우리 가족은 아는 사람 한명 없는 제주에 입도했다.

농사지으러 제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뭐라도 열심히 할 자신이, 우리 세 식구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온 귀덕리는 농사를 짓는 농촌마을이다. 당연히 농사가 눈에 들어왔다. 집앞에 나오면 밭에서 삼촌(제주에선 할머니·할아버지를 삼촌이라 부름)들이 일을 하고 계셨다. 나는 밭에 들어가 도와드렸다. 농사일을 해본 적 없는 내가 도와드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삼촌들이 하는 일을 유심히 봤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였다. 난 그걸 했을 뿐이다.

처음엔 제주어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웃으며 일하는 것뿐이었다. 신기한 사실은 나는 주민들을 한분도 모르는데 주민들은 나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왔다는 자체만으로도 동네에선 이미 화제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데 밭에도 기웃거리니 할망(할머니의 제주어)들 사이에선 신기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는 서서히 농사에 스며든 게 아니었나 싶다.

이듬해에 농사짓기 위한 땅을 매입했다. 1650㎡(500평)의 맹지를 3.3㎡(한평)당 4만원에 구입했다. 도시에 살던 내가 계속 농사지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무리하지 않은 규모로 땅을 샀다. 귀덕리는 제주에서 쪽파로 유명한 마을이다. 가장 많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쪽파 재배기술도 제주에서 으뜸이다. 그래서 나의 첫 농사는 쪽파가 됐다.

비료를 뿌리고 방제작업도 하며 열심히 키웠다.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스럽게 쪽파 키우기에 성공했다. 수확한 쪽파는 뿌리를 자르고 끝을 다듬어 출하해야 한다. 깐 쪽파가 가격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성 때문이다. 매일 아침부터 밤 10~11시까지 쪽파를 다듬었다. 처음엔 손에 익숙하지 않아 온종일 해도 하루에 2~3상자 출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일이 손에 익으니 혼자서도 11상자까지 출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간 날 때는 다른 집 쪽파 다듬는 일도 도왔다. 일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 때 마을에 적응돼 간다고 느꼈다. 그때 그렇게 배운 일이 큰 도움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짓는 땅이 점점 넓어졌다. 마을 삼촌과 형님들로부터 밭을 빌리게 된 것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트랙터도 구입했다. 마력수 낮은 중고 트랙터지만 나에게는 꿈을 이룬 듯 기쁜 순간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밭을 쇄토하고 이랑을 내야 하는데 트랙터가 없으니 형님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영농자립, 내가 이루고픈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트랙터를 구입했다는 것은, 그것도 농사를 통해 번 돈으로 구입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트랙터가 생기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삼촌들 밭을 갈아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수입도 늘었다. 농사에 자신감도 붙었다. 더 부지런히 일했다. 해 뜨기 전에 밭에 도착해 해가 뜨기 시작하면 바로 일하기 시작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일에 빠져 살았는지 모르겠다. 해가 떠 있을 때 집에 온 적이 없으며 창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밤에만 했다. 열정과 성취욕에 힘든 줄도 모르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찌 인생에 좋은 일만 생기겠는가. 겨울에 브로콜리 수확이 한창인데 설 연휴가 찾아왔다. 설 연휴에는 경매시장도 연휴였다. 브로콜리는 수확 후 상온에서 며칠을 보관할 수가 없다. 수확하면 바로 출하해 다음날 경매하든지 아니면 저온저장고에 보관해야 한다. 저온저장고가 없던 나로서는 설 연휴 전에 수확한 브로콜리를 저장할 수 없었다. 하루에 70~80상자를 수확하는 철. 그런데 연휴라서 출하를 못하고 저장할 곳도 없으니 수확한 브로콜리들이 다 상하게 된 상황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저장할 저온저장고를 찾았다. 정말 눈물 나는 순간이었다. 영농규모를 키우려면 그만한 영농자립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짐했다. 영농자립을 이뤄보겠노라고.

이듬해 육지에 있던 집을 처분했다. 더이상 육지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갈 길은 농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제주의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시기였다. 먼저 밭과 창고 지을 부지를 샀다. 자산 모두를 땅에 투자했다. ‘집은 돈이 나가는 곳이고 땅은 돈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삼촌들이 자주 이야기해주셨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밭이나 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으니 나조차도 집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땅에 저온저장고와 창고를 지었다. 중형 트랙터도 구입해서 이제는 트랙터가 두대다. 덕분에 정식철에는 하루 13~14시간이나 밭만 간다. 시간이 없어 밤에는 라이트를 켜고 내 밭을 간다. 주위 형님들은 몸 상할까 걱정된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고.

‘부지런 부자는 하늘도 못 막는다’는 제주 속담이 있다. 제주에 내려온 후 6년 동안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 그 덕에 3.3㏊(1만평)가 넘는 면적도 부담되지 않는 농사꾼이 되었다. 형님들과 함께 농사짓다보니 마을 문화들이 자연스레 이해됐다. 귀농은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우리 각시는 전문해녀다. 수영도 못했던 각시가 이제는 국가가 인정한 해녀가 됐다. 각시는 귀덕리 최초의 귀어인이며 해녀다. 나는 귀덕리 최초의 귀농인이며, 마을 운영위원으로 뽑힌 첫번째 외지인이기도 하다. 장인·장모님도 귀촌해서 한마을에 같이 살고 있다. 앞으로도 열심히, 부지런히 살겠노라 또 다짐해본다.

   
  [최종편집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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