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원 인제군 인제읍>
 
   

경기 부천에서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귀농해 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나 남편이나 농사일은 생소해 망설였지만, 남편의 결정을 믿고 어린 딸 셋과 함께 지금 사는 강원 인제군으로 귀농했다.

도시에서 편리한 생활을 하다가 농촌으로 오니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봄·여름·가을은 그나마 견딜 만했으나 겨울이 힘들었다. 흙을 빚어 만든 집이 보온이 잘 안돼 방 안에 물을 떠놓으면 꽁꽁 얼어붙었다. 주방시설도 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 아궁이와 부뚜막이 전부였고, 불을 지필 때 뿜어져나오는 연기 때문에 살림살이는 물론 얼굴과 몸 전체가 숯검정이 되곤 했다. 상수도시설도 안돼 있어 우물에서 물을 퍼다가 생활해야만 했다.

농사일이 익숙하지 않은 남편은 이웃집으로 일을 배우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쫓겨나다시피 돌아왔고, 이를 비관하며 술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술버릇이 심해진 남편은 폭행으로 온 가족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견디기 어려운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옥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남편이 잠들면 집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이런 힘든 생활이 반복되자 돈벌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배추작업, 김매기, 도로작업장의 기수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찾아서 했다. 아이들이 엄마가 기수를 하면 친구들에게 창피하다고 해 숨어서 하기 일쑤였고, 얼굴을 못 알아보게 수건으로 싸매고 일하는 날도 많았다.

마음을 다잡은 남편도 농사일은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암송아지 2마리를 사 암송아지를 낳으면 키우고 수송아지를 낳으면 시장에 내다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어느덧 소가 15마리로 늘어나자 생활형편이 조금 나아졌고, 1997년에는 소를 모두 처분해서 그동안 살아왔던 흙집을 없애고 벽돌집으로 바꾸었다. 지금 사는 바로 이 집이다. 집을 다 짓고 입주할 때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없이 좋았다. 하지만 만족할 수만은 없는 일, 새로운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인제군에서 새 농촌건설운동의 하나로 버섯재배 희망농가를 지원해줬다. 우리는 버섯동을 짓고 ‘내린천버섯농원’이란 이름으로 버섯농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버섯댁’이란 호칭이 붙어다녔다.

쉽지만은 않았다. 빚을 내 버섯을 재배하고 내다팔아서 다시 빚을 갚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남편의 꼼꼼한 성격 덕분에 서울 가락시장에서 항상 최고가격을 쳐줄 만큼 버섯의 품질은 인정받았지만, 버섯 재배농가들이 많다보니 전반적으로 가격이 낮아 경제적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사립대학은 꿈도 못 꾸고 국립대학을 가야만 했다. 아이들의 학교 졸업으로 여유가 생겨 소득원을 늘려보고자 펜션식 민박사업을 시작했다. 래프팅 성수기와 휴가철이면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부담 없고 편안한 쉼터를 제공한 결과 또 하나의 소득원으로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형편이 점차 나아지자 그동안의 힘들고 아팠던 시절 모두가 아름답던 추억으로 자리하고, 남이 부러워할 만큼 농토도 늘어났다. 이웃주민들과도 잘 어우러지면서 걱정 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남편의 뇌출혈이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판국에 버섯을 어떻게 돌본단 말인가. 그러나 하루 한번만 허용되는 남편의 면회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는 일. 남편은 간호사들에게 맡기고 버섯동으로 향했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남편 생각뿐이었다. ‘그저 살아만 있어주오.’ 버섯은 수시로 따줘야 하고 관리를 제대로 해야 상품도 좋다. 그때처럼 건실하게 커준 버섯이 또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남편은 쓰러진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우리 가정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내가 우리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상황이 아닌가. 남편이 편안하게 영면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이를 악물고 다시 버섯 재배를 시작했다.

남편이 꼼꼼하게 쓴 작업일지는 여자들만의 버섯재배 농사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 남편이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버섯농사 길잡이를 해주는 것 같았다. 남편이 작성했던 일지대로 따르니 버섯재배는 순조롭게 잘 풀렸고 판로확보에도 지장이 없었으나, 재배부터 수확까지의 과정은 고생이 많았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버섯을 부여잡고 실컷 울기도, 잘 커준 버섯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 버섯은 발효균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꼭 다시 찾는다. 레미콘을 이용해 발효시키기 때문에 저장을 오래 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농협하나로마트와 군부대로 납품하는데, 좋은 먹거리로 친환경인증도 받았다. 예쁘게 커가는 버섯을 보고 있노라면 남편이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 겪었던 수많은 시련도 어느새 녹아내리고 남편을 향한 연민과 고마움·그리움만이 내 주위를 맴돈다.

앞으로는 섬김과 나눔을 생활화하고 봉사에도 참여해 소외되고 힘든 이웃들과 함께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다. 이미 버섯 판매행사로 거둔 수익금을 인제군 장학재단의 장학금과 장애인·복지시설의 후원금으로도 기증했다. 앞으로도 어렵고 힘든 소외계층을 돕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솔선수범할 것이다.

사회봉사를 위해 2015년부터 농협 농가주부모임 회장으로 각종 봉사활동과 다양한 나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람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또 2016년부터는 인제군 하추리마을 부녀회장도 맡고 있다.

아빠 없이도 잘 자라준 우리 딸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낀다. 시어머니께도 마음속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살아오신 나날들을 며느리인 내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 살아요. 이젠 기반도 잡혔으니 서로 의지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내 나이 이제 환갑. 손과 발은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부르트고 거칠어졌다. 일을 많이 해서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이곳저곳 피로가 쌓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부농을 꿈꾸게 해줬고, 삶을 살찌게 해준 버섯이 있어서 행복하다. 비록 그 삶이 눈물로 채워졌다 하더라도 꿈을 꿀 수 있음에 행복했고, 그 꿈을 향한 몸부림이 삶의 보람이 아니었나 싶다.

   
  [최종편집 : 201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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