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충남 부여군 장암면>
 
   

 내 고향은 필리핀의 소도시인 카비테로,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째다. 일곱살 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어머니가 우리 3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3남매 중에 나는 막내이자 외동딸이다. 어머니는 혼자서 우리 3남매를 뒷바라지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재봉틀을 돌렸다. 새벽에 나가서 깜깜한 밤이 돼야 집에 돌아오셨기 때문에 어머니랑 대화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자랐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장학금 덕분에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바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회사에 취직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정규직이 되었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허락을 받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학교에 다녔고, 밤에는 회사에 다녔다. 더욱 어렵지만 내가 번 돈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뿌듯했다. 하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느 날 쓰러졌다. 생활습관병이었다. 앞만 보고 너무나 열심히 달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고, 쉬지 않은 탓에 건강이 나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 바른 태도, 열심히 일한 결과로 일반 생산직원에서 승진해 사무직원이 되었다. 직장이 안정되면서 내 속에 있던 또 하나의 꿈이 살아났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 같은 자녀를 갖고 싶었던 꿈이다. ‘나와 내 자녀들의 나이 차이가 많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오랜 바람이었다.

 2008년 6월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한 결혼중개회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을 앞두고 외국인과 함께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어려워도 잘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 거라는 희망을 품고 현서씨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2008년 8월28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와 인천공항에서 남편을 만났다. 모든 것이 새로워서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승용차를 타고 나의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데 갈수록 가로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우리 집에 가는 거 맞아?’ 혼자 머릿속으로 의심했다. 내가 알고 있던 한국과 다르다. 밝은 가로등 아래 인천광역시를 벗어나 3시간여를 달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충남의 어느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집 앞의 풍경을 봤다. 집은 몇채 없고, 많은 논밭과 비닐하우스뿐이었다. 이곳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결혼을 할 때 농사를 짓는 시부모님과 같이 살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회사에 다니니까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회사에 다니고 아버님께서 하시는 농사는 휴일만 거들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님의 권유로 힘겨운 농사를 짓게 되었다.

 남편이 농사를 지으면서 나도 농사꾼의 아내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 살았던 터라 한번도 작물을 키워보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첫아이를 낳기 전에 시부모님의 무밭에서 풀 뽑는 일을 거든 적이 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도 얼마나 빠른지 나는 비닐하우스 절반밖에 가지 않았는데 그들은 벌써 비닐하우스의 맨 끝에 있었다.

 한국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남편 몰래 파스를 몇개나 붙였고, 몸살이 날 정도라서 눈물까지 흘렸다. 농사짓는 게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농사를 짓느라 고생에 찌든 남편의 탄 얼굴과 거친 손을 만져보니 미안할 뿐이었다.

 두 아들을 낳은 뒤부터는 나도 수박 농사를 지었다. 시부모님께서 수박 농사에 대해 많이 가르쳐주셨다. 처음에는 모든 게 신기했다. 내 손으로 직접 수박을 심고 날마다 자라는 수박을 보니 참 신기했다. 열대 국가인 필리핀에서 자랐지만 비닐하우스 안의 더위를 견디지 못해 토하거나 어지럼증을 겪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은 내가 꿈꾸던 일이 아닌데, 너무 어려워서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농사 안 하면 직장 생활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줄여야 하는데…. 게다가 이것은 바로 우리 집의 소중한 소득원이다. 그래, 농사는 내 꿈도 아니지만 우리 남편의 꿈도 아니잖아…. 하지만 우리 두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다잡았다. 물론 고민으로 잠을 설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농사짓는 게 좋은 점도 많았다. 식구들이랑 같이 일을 하니까 더 편했다. 농사지으면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어 몸에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농사일은 바쁠 때가 있지만 한가할 때도 많으니까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가능하면 우리 아이들한테 모든 일을 내가 직접 해주겠다는 꿈을 실현하기에는 농사가 오히려 꼭 맞았다. 밥을 해주는 엄마부터 가르치는 선생님까지 다재다능한 엄마가 되기에는 농사가 딱이었다.

 한국살이 8년차. 꿈꾸어왔던 것이랑 현실이랑 바뀐 것이 너무나 많다. 포기한 꿈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시에서 좋은 회사에 다니는 꿈은 포기했지만 농사를 지으며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또 다른 꿈을 만들어가고 있다. 농사를 짓더라도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내 손으로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수박 농사는 끝났고 지금은 고추 농사가 한창이다. 해마다 5월 말이 되면 모내기를 하느라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다. 이앙기는 있지만 오래돼 항상 남편이 모는 이앙기 뒤에 앉아 모가 제대로 심기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리 논밭부터 임대 논밭까지 농사가 많다 보니 이른 새벽부터 해가 넘어갈 때까지 남편과 들에서 살다시피 한다.

 이런 일은 한번도 꿈조차 꾸지 않았고, 지금 이런 모습을 상상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 막내가 ‘엄마’ 하면서 달려나와 품에 안기면 모든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품에 안긴 막내가 “엄마, 나는 연우 형이랑 학교(어린이집) 잘 다녀왔어요!” 하며 하루 일을 이야기한다. 흙투성이에 땀냄새 나는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애교쟁이 막내 민우와 수줍음을 많이 타는 큰아들 연우를 함께 꼭 껴안아준다.

 그리고 다짐한다.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만 내일은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엄마가 한국에 와서 미뤄둔 꿈, 그리고 우리 남편이 접어둔 꿈을 우리 아들들이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최종편집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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