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전북 부안군 상서면>
 
   

 2006년 3월 중국에서 한국인 남편과 교제를 시작해 1년 정도 사귀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 남편이 중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은 중국 사람과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는 가운데 이야기를 해보니 중국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친척분의 소개로 제 고향 하얼빈에서 만났는데, 그 당시 남편은 한국에서 마을이장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의 결혼 반대가 심했습니다. 남편 될 사람이 키도 작고, 큰아들이고, 농촌에 살고, 돈도 없고…. 어느 한가지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딸은 저 혼자라 먼 나라에 가서 사는 게 싫다고 하셨지요. 저와 남편이 거짓말을 조금 보태 설득해 승낙을 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득하면서 “한국에 가면 중국에 자주 오겠다”고 해서 간신히 허락을 받았는데 남편의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2007년 6월 한국으로 오니 정말 결혼한 게 실감이 났지요. 시댁 가족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제가 음식과 문화·언어 등 모든 것에 낯설고 어색해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치네요.

 가장 먼저 언어소통이 안돼 힘들었는데, 그 당시에 ‘다문화지원센터’는 없었고 부안종합복지관에서 한글·문화공부 등을 많이 지원해줘 적응하는 데 훨씬 수월했습니다. 특히 결혼 후 3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2명 있습니다. 김민지와 김민서이고 나이는 9살, 8살 연년생입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이며, 큰아이는 학교를 1년 빨리 입학시켰네요.

 남편은 마을이장을 보면서 농협과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일합니다. 논밭 농사지어야지, 부모님 모셔야지, 저 데리고 이곳 저곳 다녀야지 정말 한 2년 정도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언어도 문제지만 문화적 차이와 세대 차이로 많이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부녀회장을 잠시 했는데 행정과 대인관계에 눈뜨게 된좋은 계기였지요.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저희가 농사를 짓지만, 먼저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며 남편은 저더러 다문화지원센터나 복지관에서 공부만 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 한국어능력시험 4급에도 합격하고 운전면허학원에도 다녀 운전면허도 단번에 취득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어 중국어강사 자격도 취득했습니다.

 사실 남편이 나이도 많은데다 고집도 센 편이지만 저를 많이 이해해주려 노력합니다. 바쁠 때는 남편이 식사도 준비하고, 요리도 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도 해주고, 세탁기도 돌려줍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도와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제가 남편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6월 영농철이면 논으로 밭으로 가서 정신없이 일합니다. 힘이 들어도 제가 직접 농사짓고 수확한 걸 우리 가족이 먹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시골에서 농사일은 사실 큰 돈은 되지 않고 힘만 들지요. 농사꾼 마음이 다 그렇지만 가격이 형편없으면 속상해서 농사를 짓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땅이 있는데 농사를 접을 수도 없고, 앞으로 좋아지겠지 하는 희망에 힘들어도 계속 농사일을 합니다. 주로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땅콩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농사철에 제가 중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울었어요. 우리가 경제적 형편이 좋으면 1년에 한번이라도 가고 싶지만 현실은 따라주지 않아요. 남편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입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면 중국에도 자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부모님, 오빠 부부, 조카들, 95세가 넘은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가 요즘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고 해 걱정입니다. 중국을 두번 다녀왔지만 또 다녀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학교와 경제적인 문제로 쉽게 갈 엄두가 나질 않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마을 부녀회장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상서면사무소에서 홀몸어르신 돌보미로 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스물일곱분 한사람 한사람 댁으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심부름도 해드리고, 말벗도 해드리며 아주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저를 남편과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더 행복합니다.

 시아버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네요. 시아버님이 항상 남편에게 “멀리 외국에서 너 하나만 바라보고 한국에 왔다. 그러니 민지엄마한테 잘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시아버님이 정말 저한테 잘해주셨는데 제가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항상 죄송한 마음이고, 그래서 시아버님의 웃는 얼굴이 자꾸 생각나 가슴이 아프다고.”

 이 말에 남편이 얼굴을 숙이더군요. 앞으로 시어머님께 더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되는데 몸이 안 좋으셔서 걱정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 학교에서 방과후 중국어 강사로 3년째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는데….’ 남편이 말하길 “편하게 집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노래하는 것처럼 가르치면 된다”고 응원해주었지요. 다행히 학생들이 중국어에 흥미를 가지고 잘 배우고 있어 좋습니다.

 우리 가족은 2년 전에 열린 전북지역 다문화가족 ‘엄마와 함께하는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부안군에서는 세가정이 참여했는데 우리 가족은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대상을 받아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편은 이장을 마치고 협동조합에 관심이 많아 3년 전 지역농협 이사선거에 출마해 당선돼서 지금은 비상임이사로 활동 중입니다. 2년 전에는 남편이 공부가 정말 하고 싶다며 정읍의 전북과학대학 야간 사회복지학과를 다녀 올 2월에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 2급과 건강가정사 2급을 취득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는 시간은 줄었지만 남편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아이들도 좀 더 열심히 하는 눈치입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남편의 모습이 정말 좋아 행복합니다.

 남편이 저한테도 공부를 더 하라고 권유해 올해부터 저는 남편이 다녔던 정읍의 야간대학에서 같은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집안 살림은 남편이 맡아서 하고 있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면사무소에서 홀몸어르신 돌보미 일을 마치면 오후에는 부안의 미용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받습니다.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 어르신들 머리를 손질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수기를 쓰는 이 시간에 시원시원하게 비가 내립니다. 너무 넘치지 않게만 내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비가 오면 농촌은 조금 쉬는 시간이지만 너무 많이 오면 비 피해 때문에 힘들거든요.

 지금이면 남편은 홀몸어르신들의 집이나 마을 경로당을 방문해 어르신들의 안부를 살피고 있을 시간인데 비가 내려 좀불편하겠네요. 그래서 제가 공부를 더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복지 계통에서 일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고 싶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은 인구 2600명 정도의 면인데 이 중 70%가 노령인구입니다. 그래서 노인과 연관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홀몸어르신 돌보미로 일하면서 만난 기억에 남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다리가 많이 불편한 할머니였는데, 걸어 다니질 못하니까 화장실을 안 가려 하고 밥도 안 드시려고 했어요. 화장실이 집 바깥에 있으니까 추운 날은 더 그렇고, 동네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거예요.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저에게 딸처럼 엄청 잘해주셨는데, 그렇게 사시다 돌아가셨어요. 시골에는 이렇게 혼자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 문제가 될 것 같아 답답합니다. 저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있으니 앞으로 살아가는 매 순간 앞만 보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가족 정말 사랑합니다.

   
  [최종편집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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