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1982년 눈바람 불고 추운 날, 나는 세살 연상의 남편과 중매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응삼씨 비슷한 외모의 남편이었지만, 땅 많은 부자라는 중매인의 말에 감수하고 살기로 결심했다. 시댁은 충남 천안시 입장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에서는 일부 농가만이 <거봉> 포도를 재배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남편도 시댁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텃밭에 포도묘목을 심어놓았다. 무척이나 가물었던 그해 봄,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함께 물도 주고 거름도 내었다. <거봉>은 알이 황소 눈알만 하고 맛이 좋아 가격전망이 밝다는 남편 말을 듣고선 밭을 자주 들여다보고 손질해주었다. 이듬해 가을에는 나무당 몇송이씩 포도가 달렸다. 또 가격이 높게 형성돼 싱글벙글하였다.

 결혼 후 2년 뒤 시댁에서 분가하면서 받은 논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질이 나쁜 마사흙을 넣는 바람에 여러 문제가 생겼다. 할 수 없이 남편은 다른 논을 임대해 좋은 흙을 넣고 다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곳은 폭우가 내리면 침수되기 일쑤였고, 물이 빠진 후에는 나무가 시들거리며 잘 자라지 않았다.

 수차례의 실패를 겪은 후 남편은 비닐하우스에 시설재배를 하겠다며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집을 팔고 빚을 내자고 했다.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남편의 고집으로 결국 집을 팔고 비닐하우스를 짓게 되었고, 남의 땅을 빌려 작은 집도 지었다.

 포도 시설재배의 경우 병해충이 적고 포도알 터짐도 없는데다 이른 봄에 온풍기를 돌리면 수확시기를 앞당겨 높은 가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온풍기를 돌린 첫해에 포도는 많이 달렸지만, 일조량이 적어 노지포도보다 숙기가 늦게 왔다. 설상가상으로 고온장해 때문에 포도색이 잘 나오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졌다. 이듬해에는 꽃이 지고 알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살충제를 주어 포도알이 전부 쏟아져 포도나무만 무성했다. 그다음 해에는 포도나무가 너무 우거져 포도알이 잔알이 되는가 하면, 가을 가지치기 때 웃자란 나무의 앞뒤 뿌리를 너무 많이 끊어주어 봄에 싹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거듭된 실패에 나는 남편에게 포도 대신 다른 작물을 심어보자고 하였지만, 남편은 잘될 것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참다 못한 나는 비닐하우스 안의 포도나무를 모두 베어내리라 결심했다. 모두 잠든 한밤중에 톱을 들고 포도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세그루 정도 베었을 때, 갑자기 ‘죄지을 짓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무섭고 두려워 나무를 베지 못하고 주저앉아 소리죽여 울었다.

 그 후 나는 포도나무가 예전과 달리 무섭고 어렵고 높은 존재 같아서 겸허한 자세로 대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포도나무들을 대하며 혹 우리가 잘못하더라도 잘 견디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후 남편과 상의해 마사흙 포도밭에는 황토흙을 얼마간 받아서 경운기로 골마다 내주었고, 배수로를 좀 깊게 냈다. 그 덕에 예전보다 포도나무가 잘 자랐고, 열매도 탄탄하고 싱싱했다. 하지만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온풍기를 돌리지 않았고, 대신 무농약 인증을 받아 학교급식과 친환경마트 등에 출하했다.

 그러던 중 농협을 통해 일본으로 포도농사 견학을 갈 기회가 생겼다. 다양한 품종 개량 등 일본 <거봉> 재배농가들의 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포도 덕시설에서 포도만 파는 것이 아니라 포도 가공제품을 1년 내내 판매하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좋은 시설을 우리 포도밭에 옮겨와 직접 판매에 나서고 싶었다.

 당시 입장지역에는 포도 판매시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 밭 근처에 큰 덕시설이 하나 있었는데 주말이나 명절에는 포도 사러 온 손님들이 많은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 결국 남편에게 우리도 원두막을 빌려 포도를 판매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남편은 큰 덕시설 주인과 가까운 사이인데다 우리가 그 근처에서 판매를 시작하면 피해를 줄 것이고,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반대했다. 동네 이장이면서 포도작목반장인 남편인지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만두더라도 일단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아 이웃의 큰 덕시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어 있던 원두막을 빌려 장사를 시작했다.

 남편은 계속 반대했지만 당시 사는 집도 싫었고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인지라 혼자 모든 준비를 끝내고 포도 판매에 나섰다. 그러자 남편도 기왕 시작한 거 잘해보라며 아들 이름이 들어간 농원 현수막을 맞춰주는 등 여러모로 애써주었다.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원두막에서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손님 한명 없다가 저녁쯤 한분이 오셨다. 그 손님은 시식용 포도를 먹어보고선 맛있다며 4상자를 주문했다. 한상자에 8000원씩 받고 덤도 듬뿍 드리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했다. 지금은 “또 오세요”라고 인사한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되었고, 남편 말처럼 되지 않으려고 오는 손님마다 온 마음과 진심을 다했다. 밭에서 따온 갖가지 채소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점점 손님이 늘었다. 벌초 때와 추석 전날에는 예상외로 손님이 많이 와서 깜짝 놀랐다. 서울 도매시장으로 출하한 물량이 원두막 판매량의 2배였으나 매출액은 오히려 원두막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원두막 주인이 자신이 판매를 하고 싶다며 양해를 구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의 또 다른 원두막을 수리해 그곳 주인과 10년 이상의 계약을 맺었다.

 우리 포도밭은 제초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풀을 깎거나 부직포 등을 덮어 풀 성장을 억제했다. 주위에서는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우려 섞인 충고를 했지만 제초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포도 맛은 더욱 좋아져 그 방식을 고수했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 좋은 액비나 퇴비를 주로 사용하고, 당도제나 착색제 등은 사용을 자제해 자연으로 익힌 포도맛을 내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2011년 열린 ‘입장거봉포도 축제’에서 거봉포도 품질 대상을 수상했다. 손님들도 대상 받은 포도라며 축하해주었다. 그해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입장에서 조금 떨어진 성환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깔끔한 아파트 34평을 사서 이사를 했다. 그동안 살던 집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기에 이사하던 날 잠이 오지 않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2013~2015년에는 외국산 포도의 수입 증가와 경기불황 등의 여파로 서울로 출하한 포도의 가격이 안 나와 경매사와 조합 간의 다툼이 잦았다. 포도판매 원두막들도 기존 판매량의 절반 정도밖에 팔리지 않는다며 울상이었다. 그러나 우리 원두막에서는 1만9835㎡(6000여평)에 달하는 포도밭의 포도를 몇년 전부터 전량 판매하고 있다. 가격이 다른 원두막보다 약간 높아도 월등한 맛과 서비스 덕분에 포도가 모자랄 때도 있다. 2011년에 이어 2015년 열린 ‘입장거봉포도 축제’에서 또다시 대상을 수상했고, 오시는 손님들은 명품포도라며 이제 다른 포도는 못 먹겠다고 고운 항의를 하였다.

 작년에는 일하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수능도 치렀다.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 낮은 등급을 받았지만 수능을 본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앞으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려고 생각 중이다. 소망이 있다면 7급 공무원 수험생인 아들이 올해는 꼭 붙었으면 한다. 아울러 일에 치여 너무 야윈 우리 부부가 앞으로는 건강도 신경 쓰고 서로 배려하면서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최종편집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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