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경기 안성시 일죽면>
 
   

 우리 마음의 고향은 농촌이다. 또 농업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어머니나 다름없다.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흙을 근본으로 우리의 먹을거리를 만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환경산업이다.

 나는 경북 영덕의 시골에서 농업고등학교를 나왔다. 자연히 첫 직업도 면사무소의 면서기(面書記)였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농부들과 땀 흘리며 한국의 ‘그룬트비(덴마크 농촌 부흥의 아버지)’를 꿈꾸던 청년 시절도 있었다.

 그렇지만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야간대학에 다니려고 큰 도시로 나갔다. 그 결과 1968년 서울시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안정된 직장에서 공부하며 만족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시골 태생이라 마음은 언제나 농촌과 고향의 향수를 버릴 수 없었다.

 높다란 빌딩 숲에 둘러싸여 햇빛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팍팍한 도시생활이었다. 경제적으론 여유로웠고 편리하고 감각적인 만족은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살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고향과 농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절 따라 변하는 풍경과 이웃 간에 색다른 음식이라도 생기면 나눠 먹던 인정이 떠올랐다. 일손이 모자라면 모두가 나서서 힘을 모아 힘든 일을 거뜬히 해주었을 뿐 아니라 즐거워서 함박웃음을 짓고, 피곤함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내던 그 시절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추억을 잊지 못해 시골을 늘 꿈꾸며 살았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풋풋한 인정이 넘쳐나고 일한 만큼 행복을 흙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농촌이라는 미련을 버린 적이 없었다. 내 노력을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곳이 바로 농촌이자 땅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연어처럼 농촌으로 돌아갔다.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접고 1994년 지금의 서일농원에 새로운 둥지를 튼 것이다.

 당시에 그곳은 농원이 아니었다. 논과 밭 등으로 이뤄진 농지였을 뿐이다. 나는 단순 경종으로는 영농비 충당이 힘들다고 판단했다. 다각적인 복합영농과 농산물 가공을 해야만 안정된 고수익을 올릴 수 있고, 농외수입을 곁들여야 소득 향상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래서 농업기술센터와 선도농가 등을 찾아다니면서 방안을 찾았다. 책을 읽고 교육에도 자주 참여해 농사 지식을 배우고, 틈나면 마을 어르신을 찾아 말벗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농비법을 하나둘 익혀나갔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몸이 고단했지만 배운 대로 경영평가를 하며 영농일지를 쓰면서 농촌생활 적응에 심혈을 쏟았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그래도 ‘사나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면 안 된다’는 굳은 각오를 다졌다. 마음을 다잡고 수익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농업 관련 교육이나 행사장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초창기엔 콩을 심어 메주를 만들고 장을 담갔다. 배추도 심어 김치를 담가 나눠 먹었다. 그 재미가 피곤함과 고된 노동을 보상해주었다. 그런데 얻어먹던 친척들이 하나둘 콩값을 하라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바로 눈이 ‘확!’ 뜨였다. ‘바로 이것이다! 장을 만들고 김치를 담그면 앞으로 소득을 높일 수 있겠구나!’ 서광이 비추었다.

 장만드는 허가를 신청했더니 현실과 법령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실망했다. ‘다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갈까’ 고민에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꿈을 접을 수 없어 관련기관을 발이 닳도록 다니면서 힘겹게 최소의 시설을 갖춰 겨우 허가를 받았다. 그때 그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콩을 손수 재배(1차산업)해 그냥 팔기보다는 메주를 만들어 팔면 2~3배 이익이, 메주보다는 장을 만들어(2차산업) 팔면 4~5배의 부가가치가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판매점이나 대리점을 두지 않고 소비자와 직거래(3차산업)를 하였으니 중간 수수료가 없어서 소비자도, 제조자도 상생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1998년에 전자상거래를 시작했고 모범사례로도 선정됐다. 지금까지 이를 고수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농업 6차산업이다.

 특히 나는 전통방식으로, 그것도 소량만 생산하는 전통장을 나름 잘 만든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잘 팔리지 않아 재고는 쌓여만 갔다. 판로가 문제였다. 시청의 주선으로 백화점 앞마당에서 포장을 치고 시식과 판매행사를 했다. 장돌뱅이처럼 행사장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다니며 판매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발생, 기업이 줄도산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았다.

 어렵던 당시에도 농업만은 안정되고 변화가 적었음을 목격했다. 따라서 농촌에 기반을 둔 농업은 제대로 운영만 하면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당시 수집한 자료와 정보 등을 분석한 결과는 10년 후 주5일 근무·수업제와 국민소득 향상으로 여가 활용시설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농촌의 청정환경과 안전한 농산물을 활용한 농촌관광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3.3㏊(1만여평)의 농원을 9.9㏊(3만여평)로 확장했고, 장독대 3곳에 2000여개의 항아리를 진열했다. 소나무 500여그루와 사계절 피는 꽃 등을 연차적으로 조금씩 심어서 농촌관광지로 조성해 나갔다. 더구나 전통장 제조시설까지 갖추니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모델로 평가받았고 관광객들도 나날이 늘어갔다.

 주거문화의 변화로 옛날 집집이 만들던 전통 장류는 없어지고 공장제품이 지배하는 시장 환경을 바꾸는 길은 ‘안전하고 영양 풍부한 고품질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궁리 끝에 국민의 기대 수준에 걸맞은 좋은 먹거리, 전통식이지만 고품질 장을 만들려고 전문지식과 좋은 장비들을 갖춘 대학을 활용했다. 충북대 등 4개 대학교와 산학협력을 체결했다. ‘산학협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다. 대학은 ‘학교의 우수한 인력과 분석 기자재를 활용해 영세 제조업체를 돕고, 제조업체에서는 학생 실습장과 교수의 연구 대상을 제공한다’며 끈질긴 설득 끝에 겨우 성사시켰다. 성공적으로 이뤄진 공동연구협력사업은 발전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각종 특허와 디자인·신제품이 나왔을 뿐 아니라 고품질 생산으로 인한 각종 인증까지 획득해 산학협력의 좋은 사례로 평가받아 지금까지도 보람으로 여긴다.

 전자상거래로 소비자와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유통비용을 없애고, 철저한 회원제와 애프터서비스로 반복구매를 유도함으로써 매출이 날로 늘어났다. 덕분에 착실한 성장과 시설 보완 등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일시에 무리한 투자는 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농업이나 농산물 가공업은 일시에 수익을 올릴 수 없는 사업이기 때문에 빚을 내 한번에 크게 확장할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당장 이익은 적을지라도 조금씩 천천히 일궈가는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늘그막에 대학원에서 식품제조를 공부했다. 그래서 2000년에 중앙대 안성캠퍼스에서 식품제조관리 석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얻은 지식을 현장에 활용하며 큰 도움을 얻고 있다. 지금도 농업기술센터와 농협, 농업 관련 기관의 세미나 등 교육이라면 빠짐없이 참석해 급변하는 환경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배우고 있다.

 2003년에는 일죽농협 주선으로 59농가로 ‘일죽콩사랑모임’이라는 작목반을 결성, 5년 동안 연간 약 25t의 콩을 계약재배했다. 특히 일죽콩사랑모임과 서일농원 간 ‘로컬푸드 협약식’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를 열고자 농촌진흥청과 한경대학교 콩 전문가를 초빙해 농업인 대상으로 재배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친환경 콩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청국장과 된장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검사기준규격에 합격해 미국에 8년간 수출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런 성과들이 세계가 한식을 주목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자부한다.

 전통 장류는 고가의 국산 콩과 천일염, 수작업 공정, 장독대에서의 3년간 발효숙성 등으로 원가가 높아 대량생산되는 공장 장류와는 가격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판매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판로 개척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현장에서 무료 시식을 했더니 장맛이 좋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마솥 13개와 발효실 등 제조시설 견학과 체험을 하면서 현장판매까지 덩달아 늘어났다.

 농장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는데 단계적으로 식당 식단과 시설을 보완·개선했다. 식당에는 300명이 앉을 수 있는 안방 같은 분위기의 좌정식 자리를 마련하고, 된장찌개와 청국장찌개 등이 포함된 건강밥상을 선보였다. 그랬더니 이를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하루 수백명씩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농촌관광지가 되었다.

 더불어 전통식품을 제대로 알리고자 ‘슬로푸드체험학습장’을 설치해 청국장과 손두부·떡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연간 1만여명의 어린이가 찾아오고 있다. 배 과수원과 매실원·백련지·산책로·원두막·쉼터도 들러볼 만하다. 꽃과 나무 등이 잘 어우러지도록 농장관리를 하고 계절별 작물 재배 등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볼거리를 갖췄다.

 누구나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고향 같은 농촌으로 가꾼 농원은 한식을 제대로 선보이는 보기 드문 식당으로도 이름나 이젠 외국인들까지 즐겨 찾는 곳이 됐다. 더구나 농장은 우리나라 농촌발전 사례를 배우려는 외국의 ‘새마을리더 연수생’과 전국의 귀농·귀촌자, 마을소득사업을 추진하는 농업인, 6차산업 지도자 등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농산물을 가공하고 체험과 견학이 함께 이뤄지는 우리 농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미래 농촌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어 보람되고 무거운 책임감도 느낀다.

 나는 아름다운 농촌의 기름진 밭에서 청정 햇볕을 쬐고 자란 안전한 농산물을 계약재배를 통해 확보해 이를 가공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노력해왔다. 또한 안정된 판로와 소득 보장으로 지역 경기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마을 부녀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농외소득을 높여주는 ‘농업 6차산업’의 본보기가 돼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귀농·귀촌자들이 농장을 찾는 발길이 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경영사례 등을 교육·보급하는 데도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있다.

 농업이 낙후됐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발전할 여지도 많다는 뜻이므로 농업은 앞으로 희망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농업은 힘든 일이고 소득이 낮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때다. 농촌은 우리 삶의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되는 식량생산 외에도 환경정화와 친수·녹색공간, 홍수조절, 문화와 전통 보존지로서 수많은 유·무형의 기능과 가치가 있다.

 자연과 더불어 환경을 보호하고 우리의 정서를 보듬어주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선진국이 농업 자립국이듯이 우리도 생태환경 보존과 식량안보, 농촌관광지, 일자리 제공 등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분야가 농업이다.

 농촌은 자연과 더불어 시공(時空)을 넘어 따뜻하고 편안한 삶의 터전이자 살기 좋은 곳이다.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공간에서 정년 없이 일할 수 있으니 이것이 보람이고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또한 농촌은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면서 쾌적하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노후에도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앞으로 우리 농업인이 잘 다듬고 가꾸어 도시민에게 매력 넘치는 곳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최종편집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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