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충남 홍성군 홍성읍>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서는 한참 한류 열풍이 불어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드라마 안에 등장하는 멋진 주인공들을 동경하고, 그들이 입은 옷을 따라 입고 머리 모양도 따라해 보며 ‘나도 언젠가는 한국에 가서 살아야지’ 하고 막연히 한국 생활을 꿈꿔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즐겨 보던 한국 드라마는 <겨울동화>라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얀 눈이 예쁘게 쌓인풍경이 아름다워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눈 쌓인 거리에서 사진을 찍어봐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국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 가족·친구들과 헤어지고 앞으로 자주 못 보게 될 거란 걸 알기에 슬프고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살아갈 날이 더 기대되어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릅니다.

 ‘한국에 가면 드라마 <겨울동화>에서 봤던 것처럼 깨끗한 거리와 아름다운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겠지’ 상상하며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남편이 사는 집으로 가는 길.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요? 버스 밖은 이미 깜깜한 밤이 되어 보이는 것이라곤 가로등과 수많은 차로 인해 복잡한 거리 풍경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말이라서 길이 밀려 몇시간 동안 버스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느꼈던 고단함까지 더해 힘듦과 짜증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드디어 남편이 사는 충남 홍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깜깜한 시골 터미널에 발을 디뎠을 때 여태 드라마에서 보고 상상해 왔던 모습과 제가 처한 현실이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렇게 멍한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비포장도로를 달려 한참만에 시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밤도 늦고 긴 여행의 고단함에 시부모님과의 짧은 인사를 마치고 그렇게 한국에서의 첫날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저를 깨운 것은 맑은 새소리와 부엌에서 들리는 시어머님의 식사준비 소리였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얼른 추스르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어젯밤에는 깜깜해서 못 봤지만 분명 TV 드라마에서 봤던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며 방문을 열었습니다. 마당으로 나가니 제 눈앞에 펼쳐진 것은 논과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집 뒤에는 산이 있었습니다. 그 풍경들을 대하며 제가 보았던 드라마 속 그 화려한 한국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실망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날부터 저의 시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비닐하우스에 취나물을 재배하고 수확해서 파는 일이 제 일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한여름 땡볕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더위를 먹고 쓰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난 이렇게 힘들게 농사나 지으려고 한국으로 온 건 아닌데…’라는 실망스러운 생각이 자꾸 들고, 이런 제 삶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로 접어들자 어머님은 김장을 하신다며 수백포기의 배추와 무를 준비하셨습니다. 물론 그 배추와 무는 저희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님과 단둘이 그 많은 김장을 힘들게 하고 나니 어머님은 친척과 남편의 형제, 남매들에게 보내줘야 한다며 다시 그 많은 김장을 나누고 싸서 보내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려니 얼마나 서럽고 슬픈지, 고향에 계신 엄마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 혼자서 몰래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저의 농촌생활은 우왕좌왕 실수투성이었답니다. 마늘을 처음 심어보던 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씨마늘을 거꾸로 땅에 박아두기도 했습니다. 어머님이 마늘종을 뽑아 놓으라고 시키시면 어떻게 뽑는지 몰라 중간을 잘라먹기 일쑤였는데, 나중에서야 새벽이슬이 있을 때 마늘종을 뽑으면 잘 뽑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어느 날인가 부추 밭에서 풀을 뽑아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부추와 풀이 구분이 안돼 부추를 잔뜩 뽑아내 어머님께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해서 혼자 가끔 생각하며 헛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어머님이 불호령을 내리시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들어 더 실수를 하기도 했답니다.

 일년 뒤 큰아이가 태어나고 또 둘째아이가 태어나면서 ‘난 비록 시골로 시집와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다닐 때쯤엔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멋진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도 해보고, ‘예쁜 엄마, 꼭 내 일을 하는 엄마, 한국말을 잘하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한국말을 배워야지’ 굳은 마음을 먹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어학당을 수소문해 다니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결혼이민여성들을 만나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움도 주고받으며 즐겁게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어를 어느 정도 배웠으니 학교에 다녀야겠다’ 마음을 먹고 고등학교 과정을 쉽게 이수할 수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등록해서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게 됐답니다.

 제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좋은 분들과 함께 뜻을 모아 어렵지만 근처 대학에 진학했고, 과제와 시험이 어렵고 벅차기도 했지만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편입도 하고 더 욕심을 내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일하고 살림하는 틈틈이 대학원에 다닌다는 것이 꽤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해 대학원 과정에 임했답니다.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한발한발 더디더라도 꾸준히 나아가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도 많아지고, 그 도움을 받은 만큼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곳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결혼이민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제가 대신 통역을 맡아서 그들의 어려움을 전달하고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금은 홍성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고, 공공기관이나 의료기관, 그리고 어느 곳이든지 결혼이민자들이 어려움을 겪으면 달려가 그들의 귀와 입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했던 공부와 봉사활동 덕분에 저를 믿고 바라봐주는 주변 사람들이 생겼고,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고 제 도움을 고마워해주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홍성군 결혼이민자 대표로서 8개국 결혼이민자들의 자조모임을 운영해 한달에 한번씩 꾸준한 모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각기 태어난 나라는 다르지만 한국으로 이민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함께 모여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하고, 자기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으며 정을 나누기도 한답니다. 다문화가정과 결혼이민자들을 위한 정보를 공유하고, 일자리도 함께 나눠 취업을 통해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뒷받침해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십여년 전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계기로 다른 삶을 상상하게 됐고, 어려웠지만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민온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힘없고 초라한 여자가 아니라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생기가 도는 당당한 여성이 됐습니다.

 다문화가정의 결혼이민여성들이 언제까지 주변사람들과 정책에 도움을 받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주어진 정보와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참여해서 자신들이 속한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들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중간자적 역할을 열심히 해낼 것입니다.



   
  [최종편집 :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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