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경북 안동시 송현동>
 
   

 나는 가난한 화전민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살 때 어머니가 돌림병으로 돌아가셔서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다. 어릴 적부터 배가 고파 이웃집을 서성이며 밥을 얻어먹었다. 그때 보리밥알 하나라도 떨어뜨릴까 봐 조심하고 손에 묻은 된장국물까지 다 핥아 먹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가난한 형편 탓에 위로 다섯 남매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고, 막내인 나만 열한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첫날 아이들이 모두 나를 보고 웃었다. 영문을 몰랐는데, 내가 바지를 입지 않고 웃저고리만 입고 갔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바지를 입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할 때까지 한번도 점심을 싸간 적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올 때면 배가 너무 고파 봄이면 소나무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먹고, 여름·가을이면 머루·다래·산복숭아 등을 닥치는 대로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월사금을 못 내 학교를 그만둔 뒤 아버지를 도와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갔는데, 배고픈 것은 여전했다. 집이 가난하니 돈을 부쳐달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잔꾀를 부렸다. 인사계장에게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통신업무가 곤란하니 취사반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취사반은 사회에서 식당일 하는 사람만 되니 대신 돼지를 길러보라”고 하셨다. 바로 보직을 바꿔 식당에서 남은 음식물과 눌은밥으로 돼지먹이를 하니 눌은밥은 나도 먹고 돼지도 먹어 배고픔이 해결됐다.

 그때 돼지똥은 땅을 파고 묻었는데 무척 아까웠다. 퇴비를 만들어 밭에 주면 농작물이 잘 자랄 것 같았다. 월급날, 외출해 철물점에서 큰 괭이를 하나 사왔다. 부대 안 빈터에 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은 다음 취사반 식당에 가져다줄 요량이었다. 이를 안 인사계장이 일요일에 전 중대원을 동원, 야전삽과 곡괭이로 600평 정도 되는 땅을 밭으로 일구었다. 풀을 베어 돼지분뇨와 섞어 퇴비를 만들었다. 철망 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밭에는 국 건더기가 될 만한 근대·아욱·주키니 호박·무·배추를 심어 식당에 공급하니 중대원의 급식에 큰 도움이 됐다. 인사계장은 이런 나를 ‘농림부 장관’이라고 불렀다.

 돼지 2마리를 잡아 중대원이 회식하던 날, 인사계장은 나를 앞으로 불러내 “이 고기와 채소는 농림부 장관이 애써 길러 여러분이 회식을 하게 됐다. 농림부 장관에게 박수!”라고 치켜세웠다. 중대원은 물론 중대장과 중령인 통신참모까지 일어서서 일병인 내게 박수를 보냈다. 이후 모든 중대원들은 나를 ‘영농참모’라고 불렀다. 7월에 옥수수를 수확하니 500자루가 나왔다. 전 중대원 한명당 2개씩 돌아갔는데 모두 배고플 때라서 나를 고맙게 생각했다. 제대 특명을 받고 “사실은 귀가 멀쩡하다”고 밝히자 인사계장은 “네 거짓말 덕분에 우리 중대원 급식에 큰 도움이 됐고 돼지도 잘 길러줘 고맙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제대 후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고, 결혼한 뒤에도 이어졌다. 아내와 함께 밤늦게까지 밭을 만들어 보리·감자·고구마·옥수수를 심었고, 1년이 지난 뒤에는 고추와 잎담배를 심었다. 시간 나는 대로 산에 올라 약초를 캐고 5일장에서 팔아 돈을 모았다. 아들이 태어났고, 그해 가을에 고추·잎담배를 판 돈과 약초·장작 판 돈을 합하니 5만원이 됐다. 그때가 1970년이다. 산골에 살면 아들을 학교도 못 보낼 것 같아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내는 아무런 기술도 없이 도시에 나가 어떻게 살려느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도시 변두리에 살면 막노동을 할 수 있고 농사 품팔이도 가능했다. 또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찌꺼기로 돼지를 기르면 사료값을 아낄 것 같았다. 그렇게 돈을 모으면 밭을 사 채소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당시 안동군 임동면 고천2리 덕강이라는 오지마을에서 60리 떨어진 안동 시내에 전셋집을 구하고 헌 자전거를 한대 사니 돈 5만원이 모두 없어졌다. 나는 보리쌀 두말과 이불을, 아내는 아이를 업고 옷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산골마을을 내려오는데 아내가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힘들여 만든 밭을 버리고 오니 아깝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시에 나가 돈 벌어서 더 좋은 밭을 사 농사지으면 된다”고 아내를 달랬다.

 이사 후 나는 공사장 막일을 찾았고, 아내는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농사일 품팔이에 나섰다. 일은 힘들었지만 돈을 모아 자식들 공부시킬 것을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났다. 공사판에서 돌아올 땐 헌 콘크리트 벽돌 몇장을 자전거에 싣고 와 돼지우리 두칸을 만들었다. 군대 시절 돼지를 길렀으니 분만부터 새끼 관리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새끼돼지 한쌍을 사 어릴 때는 사료를 먹이고 조금 자랐을 땐 식당에서 얻은 음식물찌꺼기를 물에 씻은 뒤 삶아서 먹였다. 그러자 1년 후에 새끼 10마리를 낳았다.

 당시 이웃에 살던 안동농협 조합장에게 “집도 없고 논밭도 없는데 조합원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돼지만 있어도 조합원이 될 수 있고, 조합원이 되면 사료를 무상으로 준다기에 84번으로 조합에 가입했다. 내 재산은 큰돼지 2마리와 새끼돼지 10마리가 전부였으며, 안동농협에서 제일 가난한 조합원이었다.

 그때 마을에 사는 30가구는 대부분 채소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팔거나 노점상을 했다. 모두 가난을 면치 못해 형편이 어려웠다. 내가 처음으로 돼지를 기르자 한집 두집 따라 기르다가 결국 온 동네에서 돼지를 길렀다. 그러다 보니 퇴비 사는 돈도 절약되고 채소도 더 잘 자라 모두 잘살게 됐다. 나는 종돈 10여마리를 길러 1년에 새끼돼지 200마리 이상을 생산했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돼지박사’라고 불렀다. 이사온 지 3년 만에 살던 집을 구입했다. 또 안동에 자가용 트럭이 거의 없던 1988년 당시에 1t 트럭을 구입해 돼지 먹이를 실어날랐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 지역에 논밭 600평을 샀다. 돼지분뇨를 남 주기가 아까웠는데, 내 땅에 퇴비로 넣으니 채소나 벼가 모두 잘됐다. 채소와 벼는 물이 생명인지라 큰돈을 들여 전기를 끌어와 지하수도 개발했다. 어릴 적부터 배를 너무 곯아 배고픈 기억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쌀가마니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가 됐다. 한편으론 돼지를 팔아 수송아지 2마리를 샀다. 새벽에 일어나 꼴을 베고,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돼지먹이를 가져왔다. 아내는 송아지와 돼지를 돌보느라 남의 집에 품을 팔 시간이 없었다. 송아지는 아무 탈 없이 잘 커서 2년을 길렀더니 큰소가 됐다. 소 팔고 돼지 팔아 모은 돈으로 수송아지 6마리를 샀다.

 2년을 기르자 송아지 6마리가 모두 큰소가 됐다. 소값이 많이 올라 1마리를 팔면 논밭 열마지기보다 소득이 더 높았다. 소를 더 많이 기르기 위해 원래 갖고 있던 밭에서 100m 떨어진 곳에 농지 400평을 더 샀다. 동·서·북쪽이 산으로 막혀 있어 겨울에도 소를 기르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땅을 사느라 돈을 다 써 우사를 지을 돈도, 송아지를 살 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비닐하우스를 짓고 채소농사를 지었다. 돼지우리도 만들었다. 1년 후 소값이 폭락해 소를 팔아 밭을 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내 평생직장이 생겼다.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 돼지먹이를 가져오는 식당에 팔았다. 5일마다 서는 안동장에도 갔고, 다 못 팔면 노점에서 팔았다. 이때 우리는 텃세에 밀려 외진 곳에서 장사를 했는데, 어느 날 그 자리 바로 앞에 약국과 병원이 들어서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당일 수확한 싱싱한 채소를 다른 상인보다 싸게 파니 잘될 수밖에. 삼남매가 대학을 다녀도 돈 걱정이 없었다. 그 사이 원래 살던 마을에 도로가 닦여 보상금으로 아파트에 살게 됐다.

 자녀 셋을 모두 결혼시킨 후 밭에다 집을 지어 이사했다. 남은 공간에는 왕대추나무 300그루를 심어 작년부터 수확하고 있다. 대추나무 사이에는 땅콩·감자·고추를 재배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돼지우리에서는 표고버섯과 흑염소도 기른다. 산약(마) 농사를 지은 지 15년 됐는데, 처음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마가 나왔다. 다른 농가에선 마 씨앗이나 윗부분 순을 다시 심어 손가락 반만 한 크기의 마를 생산했지만 나는 엄지손가락만 한 마를 씨마로 삼으니 다른 농가들보다 몇배나 컸다. 작년에는 보통 마보다 10배나 무거운 6㎏ 초대형 마를 수확해 <농민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나는 이 마를 씨마로 특별 관리하고 있는데, 지난해 2개였던 마순이 올해는 6개나 나왔다. 가을쯤 무게가 10㎏이 넘는 마가 생산돼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외진 산골에 살 때 고라니 피해를 입은 경험을 살려 고라니와 멧돼지를 쉽게 잡을 수 있는 포획기구도 직접 고안해 갖고 있다.

 옛말에 왕대그루에 왕대 나고, 선비 밑에 선비가 나며, 부자도 대를 이어 부자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빈손으로 시작해 자녀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켰으며 10억원이 넘는 재산과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옛말과는 정반대다. 아들은 학원 한번 안 다니고 공부해 고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결국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또 큰딸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나와 선생님이 됐고, 막내딸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키 158㎝에 몸무게는 52㎏으로 작은 체구다. 불볕더위에도 쉬지 않고 일하지만 건강검진을 받으면 몸 어디 한군데 탈난 곳이 없다. 45년 전 농협 조합원에 처음 가입했을 땐 가장 가난한 조합원이었지만 지금은 6400명의 조합원 중에서 제일 잘산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아마 자녀 교육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나는 논밭을 옥토로 만들었고, 땅은 나를 부자로 만들어줬다.

   
  [최종편집 :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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