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충남 홍성군 홍동면>
 
   

 1997년 9월21일, 우리 가족이 복잡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이곳 충남 홍성에 새롭게 둥지를 튼 날이다. 당시 삼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지금 오십을 넘겼고, 어린이집에 다녔던 큰아이도 어엿한 대학생으로 변신했다. 해가 떠오르는 홍성의 동쪽인 홍동면, 국내 오리농법의 발원지라는 이곳에서 보낸 7200여 날들을 떠올려보니 마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기억들이 생생하다.

 서울을 떠나기 전 우리 가족의 삶은 생애 처음 분양받은 아파트 건설사의 부도로 무척이나 고달팠다. 가구별로 소유권 등기 이전을 하기 전에 일이 잘못돼 1년 반 가까이 재산권확보추진위원회 총무로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사태 해결의 가닥을 마련한 터라 도시생활에 미련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아파트를 임대하고 전세금 4700만원을 받아 집수리비와 첫해 생활비 5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비슷한 시기에 광주행을 택한 누나와 지역 신협에 나누어 맡겼다.

 귀농 준비기간을 약 1년으로 결심한 순간, 무지파일 3권을 준비해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PC통신에 접속해 관련 정보를 모았다. 아울러 막 결성된 민간 귀농운동 단체의 교육에도 아내와 교대로 참석했다. 1997년 이른 봄부터 본격적으로 귀착지를 탐색한 결과 4월경 지금 사는 홍동면으로 마음을 굳혔다. 홍동은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서 처음에는 혹시라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길까 봐 꺼렸지만, 귀농 전 세운 원칙 중 하나인 ‘아이들 또래가 있는 곳으로 간다’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그즈음 이민 가는 것은 이해해도 시골행은 용납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던지라 지인과 친구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이삿날에 집수리도 덜 된 낡은 임대농가에 짐을 풀어놓고 우려 섞인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친구들을 배웅하며 마음속에 되뇌었던 다짐을 아직 잊지 못한다. ‘걱정 마라. 내가 5년 안에 보란 듯이 안착해서 너희의 우려를 싹 가시게 해줄 테니….’

 귀농학교 시절 “시골 사람들 수틀리면 낫 들고 쫓아온다”는 말을 들었기에 바짝 긴장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농사일로 바지런을 떠는 우리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임대한 집과 농토가 동네 입구인지라 모두가 지나다니며 지켜보는 가운데 첫해부터 한 밭에서 완두·참깨·배추를 이어짓는 3기작에다 소득작물로 심은 생강을 2t가량 수확했다. 그러나 가격이 폭락한 탓에 수확을 포기하는 농가도 생겨났다. 나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자 채소 장수들이 사용하는 빨간색 핸드마이크를 구입했다.

 급히 토굴을 파고 생강을 임시 저장한 다음 홍성과 광천은 물론 청양·보령 등 인근 시·군 장터를 돌았다. 확성기로 떠들며 파는 모습을 보고 동네분들은 다들 “산꼭대기에 갖다놔도 살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해 겨울, 새해 영농계획을 세우며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첫해지만 다행히 적자는 아니었다.

 이듬해부터 5년간은 새내기 농부로서 온 힘을 쏟은 기간이었다. 첫해 70%에 그친 유기농 비율을 3년차부터는 전체 농토로 늘렸다. 특히 2년차부터는 귀농 후배들의 농사를 조금씩 보살피기 시작했다. 첫 농사를 지을 때 논을 말리지 못해 대부분 낫으로 수확해 막탈곡기로 턴 고생이 ‘내 이후로 오는 후배들에게는 두번 다시 같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져 멘토를 자처한 것이다.

 후배들이 오면 거름 준비부터 경운, 재배와 관리 등 작물의 한살이에 맞춰 파종에서 수확까지 마치 영농지도사처럼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예를 들어 거름이 부족하면 거름을 더 주고 솎을 시기가 되면 얼른 솎으라고 안내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지역에선 멘토링 외에 당시 창안한 S.O.S(에스오에스) 제도가 굳건한 전통으로 이어져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선후배들을 무상으로 소집할 수 있는 권리가 새내기 후배들에게 부여된다. 한 예로 벼가 엎어지거나 옛집을 부술 때 등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면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받는다. 올해도 어려움을 겪는 후배 농가를 위해 S.O.S 문자를 보내자마자 10명 가까운 선후배들이 몰려와 감자·마늘 수확을 돕고 트랙터로 밭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이렇게 후배들의 영농은 물론 빈집과 농토 알선 등 시골살이 전반을 안내하다 보니 7년차부터는 시골살이를 꿈꾸는 도시민 앞에 서게 되었다. 귀농교육 수강생이 어느덧 강사로 변신한 셈이다. 당시 도시생협이 주관하는 우리쌀 지키기, 우리밀 살리기 대회 연관 행사에도 ‘농부 강사’로 나서 수십여차례 농업·농촌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렸다. 특히 2005년에는 제초제 <그라목손>의 가공할 폐해를 인지한 후, ‘만인(萬人)을 목표로 이 약의 위험성을 알려 다른 나라처럼 제조·유통·판매금지를 이끌어낸다’라는 다짐을 꾸준히 실천해 2012년 10월31일 판매 금지일까지 연인원 9975명을 교육했다. 교육 때 아예 약병을 들고 다니며 처음 10분간은 약장수처럼 병을 흔들어대며 약의 폐해에 대해 힘주어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용도 외 사용으로 사망하는 분들이 대부분 이 약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농업인이었기 때문이다.

 귀농 후배들에 대한 관심과 헌신으로 인해 2009년 전국귀농운동본부 홍성귀농지원센터장 역할을 부여받았고, 2012년에는 충청남도에서 시행하는 충남발전대상 귀농·귀촌부문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아울러 2009년에는 충남도농업기술원과 협약해 귀농매뉴얼인 <귀농·귀촌 그 아름다운 도전을 위하여>를 펴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홍성군농업기술센터와 연계해 <시골 사람은 거울이다>와 <도시인, 홍성의 농부로 살다>를 연이어 발간했다. 올해는 민간 출판사와 함께 귀촌인들을 위한 매뉴얼 발간을 조율 중이다.

 홍성군에 귀농·귀촌종합지원센터를 구축하기 전까지는 ‘귀농=이환의’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였다. 그래서 도시민이 면사무소나 농협 등 지역 내 공공기관이나 단체에 문의할 때 대부분 나를 소개해 방문자가 많을 때에는 단체를 포함해 연간 수백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는 오랜 기간 상담과 안내를 지속했고, 지역 신문에 관련 칼럼을 기고해 왔으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교육을 진행하고 세미나 등에 참여해 온 까닭이다. 이 밖에도 귀농 관련 온라인 교재 동영상 콘텐츠 자문, 지역사례 발표, 공공기관의 귀농 커리큘럼 심의위원으로 활약하며 십여년간 현장의 목소리를 학계와 관계 기관에 생생히 전달해 왔다. 그 결과 귀농 이후 지금까지 도시민과 농업인 등을 대상으로 귀농·친환경 교육과 상담·안내 인원만 약 1만5000명에 이른다.

 외부 활동을 병행하면서 지역민에게 농사꾼으로 인정받은 것은 확실한 강점이다. 이는 귀농 전에 세운 원칙인 ‘농기계 자립과 가족농 원칙’을 소신껏 지켜온 덕분이다. 농촌에 와서 살아보니 기계든 인력이든 농작업을 외부에 의존해서는 자립이 힘들 것 같아 초기부터 중고 소형 농기계를 직접 운용했다. 특히 사용기간이 짧은 농기계는 귀농 동료 여럿과 공동으로 운용하는 등 상황에 따라 합리적으로 대응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판로도 생협 출하와 직거래로 귀농 이후 한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 농산물의 맛과 품질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시 생협의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늘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오랜 직거래를 통해 마니아층이 생겨 고구마·감자·완두·마늘 등은 수요보다 늘 생산량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고구마나 감자는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다니지 않고 항상 맛이 보장된 땅에만 심고, 완두는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품종에 밥밑콩으로 알맞게 익은 것만을 골라 보내며, 마늘은 비닐하우스에서 햇볕과 바람으로 두달 가까이 말려 이듬해 가을까지 썩는 것이 거의 없는 까닭이다. 마늘은 예전처럼 처마 밑에 엮어 매다는 방식으로는 장마가 길어지거나 상대습도가 높으면 부패를 막기 어렵다. 고심 끝에 농가마다 설치된 다목적 하우스에서 햇볕과 바람으로만 말리자 결과가 확연히 달라졌다. 7~8월에만 50% 차광막을 쳐주면 썩는 마늘이 거의 없어 소비자들의 재주문이 이어진다.

 마늘을 사례로 들었지만 농촌에 살아보니 이와 비슷한 저마다의 비법들이 적지 않다. 다만 공유가 안될 뿐이다. 그래서 콤바인을 이용한 수수 수확과 벼망사를 이용한 들깨 선별, 등짐분무기를 이용한 페인트 작업 등등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농민기술 모음집’을 머지않아 출간할 꿈을 꾸고 있다.

 비록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농촌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겠지만 마을과 지역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내려 마음 한구석은 늘 분주하다. 마을에서 이장직을 제외한 직책은 두루 경험했고, 생산자단체와 면내에서도 몸으로 움직이는 직분은 대부분 경험했다. 지역에서 한창 일할 때는 작목반장 두개와 총무직 서너개를 동시에 맡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마을에 있는 생협에서 도농교류를 담당할 때도 기존의 수확체험에 다양한 생태놀이를 결합해 도농교류의 내용과 질을 한단계 높였다는 칭찬을 들었다. 비슷한 예로, 지난 3년간은 홍성농촌체험관광협의회의 임원으로 갓 설립된 협의회를 차별화된 홍보와 기획으로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후한 평가를 들었다.

 2011년에는 그간의 도농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농장이 농촌진흥청이 주관하는 교육농장으로 지정돼 재미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도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귀농 교육농장으로 특화해 견학·귀농 투어·기초농업 실습 농장 등 민간단체나 공공기관과의 연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자산으로 농가숙박형 소규모 귀농교육장으로 자리매김해 농사가 생소한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엄마가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키는 것처럼, 차근차근 꼭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교육과정을 준비 중이다. 이미 도시민 체류공간을 네곳이나 마련했고, 교육장도 완비해 내년부터는 농장 전부를 명실공히 교육농장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이런 결과들이 하나하나 더해져 지금은 이른바 성공한 귀농 사례로 소개되지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아직 부족함이 많다. 워낙 관심 분야가 다양해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에 비춰볼 때 아직 줄여야 할 것들이 적지 않고, 주변의 요구를 끊지 못해 에너지가 분산되는 단점이 있다. 또 교육·상담·안내·영농지도 등을 병행하다 보니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소홀한 게 사실이다.

 물도 차야 넘치고 기(氣)와 에너지가 넘쳐야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올해는 외부 활동을 줄이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스스로를 채워가는 중이다. 그 결과 장단기 과제와 앞으로 10년간 연도별로 해야 할 계획표를 완성했다. 살짝 공개해보면, 단기 과제는 귀촌인을 위한 매뉴얼 발간과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농민기술 모음집 발간, 걸음마 농부학교 운영이며 장기 과제는 농민신문고 ‘동네북’의 운영이다.

 동네북은 귀농 전 시도했던 소비자운동의 농촌형 버전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농업인들을 돕기 위한 컨설팅 프로젝트의 명칭이자 온라인 블로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신문고처럼, 혹은 동네북처럼 누구든지 와서 두드리면 문제 해결을 위한 고충 상담과 안내 등 컨설팅을 해주려 한다. 이미 관련 서적과 잡지·논문 등을 숙독하고 있으며, 적절한 때가 되면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농업인으로 살면서 억울한 일을 종종 당하지만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하는 분들이 대다수인지라 누군가는 여기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에서 비롯됐다.

 일복(福)도 복의 하나라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농촌에서 할 일이 넘쳐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농부다.

   
  [최종편집 :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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