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름:탄티홍·31·강원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2018년 동계올림픽의 꿈을 이룬 평창에는 희망이 넘치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다. 나는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데이트도 할 겸 집 뒤에 있는 언덕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두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별자리를 가지고 자기의 별을 찾는 놀이를 한다. 오랜만에 아이들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해진다. 내 별은 어디에서 온 별일까? 어떤 별인데 날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보내서 우리 가족을 만나게 했을까? 어떤 별이라도 난 정말 고맙다. 한국의 농촌에서 제2의 내 인생을 뿌리내린 그 자체가 나는 감사하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건 한두가지가 아니다. 매일 같이 바쁜 엄마를 말없이 기다리다가 집에 오면 “안아 주세요. 뽀뽀해 주세요”라고 하는 우리 아이들이 고맙다. 밥을 제대로 차려 준 적 없는 바쁜 며느리를 보며 안타까워하시는 시부모님, 살림 잘 못해도 항상 지켜 주고 사랑해 주는 남편, 만나면 언제나 칭찬해 주는 동네 분들도 모두 정말 고맙다.

 돌아보니 한국에 온 지 어느새 10년. 한국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생활한 10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큰 변화였다. 한국에 오기 전, 나는 그냥 책과 공부를 좋아하고, 문학 선생님이 꿈인 평범한 소녀였다. 글을 좋아해 책이나 신문을 보면 정신없이 읽다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사범대학에 진학해 내 꿈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 때우느라고 힘든 엄마를 보며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호찌민시에 있는 한 구두공장에 취직하게 됐다. 그때 남편과 만나면서 인연이 닿아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4남매 중 장남으로 책임감이 크고 집안의 일을 도맡아 한다. 남편과 처음 만날 때 통역하는 사람이 남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고, 장남이라고 소개해 주었는데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냥 하는 얘기겠지? 설마 그러겠어!’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집안 살림은 큰언니가, 다른 일들은 두명의 오빠들이 했고, 작은언니도 있었다. 집안일 신경 안 쓰고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책을 읽는 게 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공부만 잘하면 살림이고 뭐고 안 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었던 나인데 한국에 와서 어느새 시골 농사꾼 집의 큰며느리가 되어 농사꾼 아줌마가 다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순탄하지 않았던 세월을 지내야만 했다. 힘든 농사일과 불안정한 수입, 그리고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마음의 숙제를 고민하느라 힘들었다. 처음에는 한국의 농사를 체험할 수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겼는데, 계속되는 일에 짜증과 고단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추 심는 날이 되면 온종일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땅만 보며 모종을 심어야 했다. 저녁이 되면 온몸이 다 쑤시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모내기 때가 되면 논에 가서 모내기를 도와주고, 이어 고추 심기와 고추 잔가지 따기, 고춧대 지지용 말뚝 박기 등의 일로 종일 밭에서 살아야만 했다. 가을 추수 때면 고추·감자·배추 등을 제때 수확하고 출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름에 하루를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말이 있어 시간하고 씨름해야 했다. 아침이면 밭에 가고 저녁 되면 살림하고 아이 돌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으로, 내 삶은 365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바쁘기만 했다.

 그렇게 봄부터 애쓴 농사가 추수 때 꼭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서 모종을 심지만 태풍이 크게 오면 비닐하우스가 날아가고 고추는 다 죽고, 잘 되었다 싶으면 농산물 값이 떨어지고 하다 보니 빚만 늘어났다. 사정이 그러니 친정 부모에게 돈을 보내 줄 생각도 할 수 없어 마음 한구석은 항상 속상했다.

 착하고 자상한 남편을 보면 살고 싶고 농사일을 생각하면 한국이 싫었다. 살림을 잘 못해도 말없이 지켜 주시는 시부모님을 보면 살고 싶고 농사를 보면 도망가고 싶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착한 엄마가 되고 싶고 농사를 보면 포기하고 싶었다. 그만큼 농사일은 나에게 스트레스였다.

 2006년 여름, 한국에 온 지 겨우 2년째인데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왔다. 돌아가시기 두달 전 시부모님 덕분에 큰아들을 데리고 베트남에 다녀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앓고 계시는 병은 감염되는 병이라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던 난 결국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아버지께서 세번이나 목수술을 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국에 돌아갈 때 아버지께선 내게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오직 한국에 가서 잘 살아야 한다고 간신히 종이에 적어주셨다. 항상 아버지에게 강한 딸의 모습을 보여 드렸었는데, 애타게 나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감췄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두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 됐다. 그로부터 5년 뒤 엄마도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또다시 타향에서 떠나보내야만 했다. 아버지를 다른 세상에 보내야 했던 엄마는 아버지를 잊지 못해 몸이 상하기 시작했고 당뇨 합병증으로 나중엔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태였다.

 힘겨운 한국생활과 부모님에 대해 효도를 하지 못해 생긴 상처를 겪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한국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나의 예전 생활방식과 정신력, 나 자신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 욕심과 불만 그리고 비교가 나 자신에게 생긴 것이었음을.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짐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그리고 나의 행복도 내 손으로 꼭 만들어 내야겠다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돈도 없고 부모에게 효도도 못했지만 이제 꿈과 희망, 행복의 나무를 심었기에 내게는 더 멋진 미래가 있다.

 한때 남편을 만나 한국에 시집온 선택이 창피하고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이제 한국에 유학을 오면서 남편을 만났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꿨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오고 싶어 하지만 못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를 나 자신에게 일깨웠다.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려고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어도 배우고 요리도 배우고 알뜰하게 살림하는 방법도 배웠다. 지금은 그냥 열심히 사는 한국 아줌마 중 한 명이다.

 춥고 황량한 겨울을 거친 나무가 봄 소리에 깨어나 파릇한 새싹을 틔우고 온 하늘을 희망의 색으로 채우듯이, 나에게도 곁에서 지켜 주시는 사랑하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있다. 그리고 내 몸에서 태어난 씩씩한 두 새싹, 열살과 여덟살의 천사들이 있으며 이 두 천사는 희망의 나무를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거름이 되고 있다.

 나는 지금 예전처럼 농촌을 싫어하지 않는다. 조용한 농촌이 아름다운 글과 맑은 마음을 내게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공부도 다시 하고 있다. 이제 한국어를 외국어 공부하듯이 열심히 배워가고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고, 더불어 농촌의 아름다움을 내 글에 실어 온 대한민국으로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글쓰기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더운 날이면 농사일을 마친 뒤, 남편과 나는 애들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개울로 간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개울에서 물고기도 잡고 다슬기도 잡는다. 저녁에는 낮에 잡은 물고기로 끓인 소박한 매운탕 한냄비로 우리 집에는 웃음꽃이 가득 핀다.

 이렇게 되기까지 주변의 도움도 컸다. 평창농협이 운영하는 다문화대학을 수료했는데 내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고, 요즘엔 조리사자격증 취득을 위한 농협 강좌에도 나가고 있다. 또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지원으로 한국어교육을 받아 한글로 된 운전면허시험을 치르고 면허증도 땄다. 한국사람처럼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글로 글을 쓰는 재미가 있어서 참 행복하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산다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는 주부모범상까지 줬다.

 나는 남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집 옆의 군청이 운영하는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다소니’에서도 근무하고 있다. 위생원 자격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엄마들에게 요리도 배우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 됨됨이를 배우고 있다. 항상 못났다고 부모를 미워하고 한국에 와서 잘 살지 못한 것이 운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이곳에 와서 많이 느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나보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 나보다 운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장애인들을 위해서라도 요리를 잘 배워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나를 애틋하게 쳐다보고 있다. 운명은 어느 누군가에게 의미 없이 어디를 가게 하고,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 가서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런 운명을 받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그 운명을 따라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많은 인내심으로 내 운명을 계속 찾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행복을 찾았으면 완전히 행복한 것이고 아직 찾고 있으면 여전히 즐거운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 인생, 내 행복을 찾고 있기에.

   
  [최종편집 :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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