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름:팜티냐이·30·경북 안동시 남선면 신흥리>
 
   

 내 고향은 베트남 북쪽에 있는 하이드영시이고 베트남 이름은 팜티냐이입니다. 친정에는 현재도 영농에 종사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여동생과 고교 졸업반 남동생이 내 몫까지 부모님을 공경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태어난 조국 베트남의 국민임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글로벌 시대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넓고 큰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감수성 예민한 시절, TV나 영화를 통해 접한 외국 문물은 나에게 꿈을 꾸게 했고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호감을 느끼며 한번쯤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상상도 해보곤 했습니다. 그러다 주변 친척들의 한국 진출 사례를 듣고 한국 유학을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한국생활에 필요한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과 조급한 마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금속 가공회사에 취업하여 실전 경험과 유학에 필요한 자금을 2년 동안 저축하면서 희망의 땅 한국에서의 생활을 꿈꿨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귀국하신 고모님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인 윤희우씨를 베트남에서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가 바뀌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성간 만남은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사랑의 종착역인 결혼식을 올리고는 평소 꿈꾸던 유학을 포기하고 대신 2005년 6월 나의 꿈, 희망의 땅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양반도시 안동, 그중에도 남선면 신흥리는 파평윤씨 집성촌으로 시내와 멀지는 않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는 한적한 동네입니다. 가구수는 고작 29호 정도에 간간이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그야말로 베트남에서 상상하고 동경했던 한국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평범한 농촌이었습니다. 밤이면 인적이 없어 무섭기도 하고 적막 속에 들리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는 향수병을 일으켰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달콤해야 할 신혼살림은 시댁의 형편상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올해로 80세가 넘으신 시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국가에서 지원하는 원호혜택을 받고 있지만 알코올 중독과 치매로 10년째 요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80세를 바라보시는 시어머니는 그간의 병수발과 가사노동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실정이었습니다. 오로지 믿고 의지해야 하는 남편은 청각장애로 남들과 대화 시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평상시 대화도 큰소리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실정이어서 이웃 주민들과의 오해는 물론 부부싸움도 여러 번 했습니다.

 외롭고 어려울 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나 친구가 없어 울적할 때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의 얼굴이 아른거려 밤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시내에 사는 베트남 친구에게 일일이 털어놓기는 싫었습니다. 그나마 향수병과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 사람은 저를 위해 안동지역 관광지를 구경시켜주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 상점에 다니며 선물로 위로해 준 성실한 남편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의 처지에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게 습관이 되어 불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2007년 우리 부부의 사랑의 결실인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과 시댁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한 가정의 아내로, 집안의 며느리로 소임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2008년 둘째가 태어나자 가정에 웃음과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정말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지나간 날들의 방황과 외로움이 철없던 시절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농사일은 물론 다른 사회활동도 많이 하지 못하고 시댁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생활해야 했지만, 큰애가 여덟살로 남선초등학교에 다니고 둘째는 유치원에 입학해 육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자 남편을 도와 농사일에도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대와 다른 한국에서의 결혼생활과 향수병으로 우울감에 싸였던 내게 변화를 준 원동력은 두 아이였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니 주변 환경 탓만 하기보다 나 스스로 먼저 노력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동시에서 시행하는 각종 이민자 적응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안동 양반문화와 생활습관, 집안 대소사 처리 등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하는 한글은 필수과목이었죠. 2010년에는 안동농협에서 실시한 다문화 여성대학을 수료했고, 이듬해부터 3년 동안 안동농협이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벌인 기초농업교육도 열심히 받았습니다.

 ‘흘린 땀방울만큼 거둔다’는 진리대로 그렇게 쉬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어느 순간 한국말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은 물론 안동지방의 사투리도 척척 알아들어 ‘안동 아지매’가 다 되었습니다. 한가한 시간이나 동네 모임이 있을 때는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 정도로 안동사람이 다 된 것 같아 가끔은 달라진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된 마당에 어르신들이 부르기 어려운 ‘팜티냐이’라는 이름 대신 한국 발음과 유사한 박씨 성에 미선으로 개명해 제2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이해되고 본격적으로 영농에 참여하면서 남편이 짓는 농사의 문제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시부모님이 해오던 방식을 고집해 새로운 작목을 재배하려는 의욕이 부족했습니다. 총 3만1680㎡(9600평·임차 농지 2만5080㎡ 포함)의 농지에 콩·고추·애호박(콩 2만1000㎡, 고추 3960㎡, 애호박 4620㎡)을 돌려짓기하여 연간 5000만원의 조수입을 올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영농비 2500만원을 지출하고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쓰다 보면 농한기에는 시아버지의 수발비용으로 매달 40만원 이상 지출되는 돈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묵묵히 일만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최선으로 여기는 남편에게 “아이들이 커가면서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면 도저히 하던 대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새로운 변화를 통해 소득향상을 꾀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직접 트럭을 운전하여 남편과 함께 인근 이천리 시설재배 지역과 특수작물 재배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를 찾아가 견학도 하고 농업기술센터의 영농교육도 찾아서 받았습니다. 교육담당자에게 소득작목 교육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도 하면서 지금까지 매년 반복되는 작목을 바꾸어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남편의 변화를 유도했습니다.

 안동농협에서 시행하는 계약재배와 농협의 계통출하 품목 등 안정적인 소득이 되는 작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안동시농업기술센터 남선상담소를 자주 찾아 소득작목으로 추진하고 있는 작목에 대한 상담도 열심히 받았습니다.

 남편의 동의를 반쯤 얻은 다음에 시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농사지어 오면서 문제가 없었다”는 시어머니는 남편보다 더 완고하셨는데 그런 시어머니의 마음을 바꾸고 응원군으로 변화시키기까지 많은 난관에 부딪혔고 주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2013년 농업기술센터 남선상담소장님의 지도로 지역에서 유망하다는 작목인 둥근마를 소규모로 실험적으로 재배해봤습니다. 일손을 줄일 수 있고 소득이 높으면서 가격도 안정적인 오미자와 둥근마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각각 1320㎡, 990㎡에 재배하고 있습니다. 콩 면적을 줄이는 대신 일반 참깨보다 수량이 많이 나는 신품종 검정 참깨(회룡)도 3300㎡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역의 새로운 소득작목인 흑토마토 재배단지 회원으로 가입해 시설하우스 990㎡를 지원받고 올해 3월에 파종하여 현재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3㎏ 상자로 출하하는 흑토마토는 일반 토마토보다 높은 가격을 받고 있으며, 출하시세가 올라가는 여름 휴가철과 가을에는 보다 높은 가격이 예상돼 더 많은 소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안정적이고 안동농협에서 수매해 판매까지 대행해 주는 애호박은 남선지역의 대표 작목으로 판로에 대한 걱정이 없고 수시로 현금을 만질 수 있어 4620㎡의 면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격이 하락하고 일손이 많이 가는 고추는 1980㎡에만 재배하여 작년보다 면적을 줄였습니다.

 콩은 2만1000㎡에서 올해 1만8480㎡로 면적을 줄여 안동농협과 계약재배를 했습니다. 콩값이 내려가는데다 일시적으로 노동력이 많이 투입돼인건비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돈이 드는 외부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남편과 둘이서 농사짓는 것이 훨씬 알차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소득안정과 경영비를 줄이는 방법으로 영농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 목표한 조수입은 8000만원이지만 올해 전반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예상보다 낮아 목표달성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목표 달성이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크게 실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농사기술도 더욱 나아질 것이고, 판매문제 등 여러 가지로 노력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잖아 억대 소득의 농사꾼으로 탈바꿈하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노력하는 자 뜻한 바대로 이루리’라는 우리 가족의 생활신조와 같이. 그래서 농촌 정착 결혼이민여성의 새로운 모습을 당당하게 알리고, 하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고 싶습니다.

 농촌 정착 결혼이민여성에 대한 편견과 오해, 열대지방인 베트남에 대한 잘못된 국민성 등 한국 사람이 잘못 아는 내용이 많습니다. 가족을 중시하고 조상에 대한 숭배와 유교적 전통이 존재하는 아세안 지역의 중화권 나라와 별 차이가 없는 곳이 베트남의 참모습입니다.

  젊은 나이에 꿈을 찾아 온 대한민국! 새로 얻은 조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사는 저는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난 조국과 새로 얻은 조국에 대한 편견과 문화적 차이를 느끼며 살아온 저와 같은 결혼이민여성들이 전국적으로 많다는 현실을 이해해 주시고, 이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당당한 국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대대손손 이어져갈 나와 남편의 후세들에게도 한때 피부와 언어가 다른 조상이 있었고, 그 조상은 우리의 가족이자 한국의 떳떳한 국민이라는 사실, 그들 덕분에 후세들도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전국의 많은 결혼이민여성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즐겁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나의 꿈 나의 미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그날까지.

   
  [최종편집 :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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